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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국내 여행지 추천: 꽃구경 명소 탑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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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eti
댓글 0건 조회 110회 작성일 24-08-2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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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구석기(약 부산고구려$ 70만년전)​구석기 전기- 큰 석기 한 개로 여러 가지 용도 -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5개 지층, 1966-1970에 조사 발굴)- 충북 단양금굴,(약 70만년 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 전기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 - 충북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남한의 처음 인골출토유적) - 연천전곡리, (아슐리안 주먹도끼)- 충남 공주 석장리 (1964~1974,총 12차례 발굴, 남한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시대 문화층 존재확인,)구석기 중기- 격지들을 가지고 단손질-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에서 사람뼈를 처음 찾아 보고, 인골화석2개)- 평양시 역포구역 대현동,(역포사람)- 함북 웅기 굴포리,(1960-1962발굴, 조개더미, 신석기 시대의 동침신전앙와장, 개 뱀 말 형상화한 호신부)- 충북 제천 점말 동굴,(주술적의미의 예술품)- 강원 양구 상무룡리,(흑요석 출토 백두산계)- 제주 빌레못 동굴구석기 후기- 쐐기를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개의 돌날격지 만듦- 종성 동광진,(1933년 철도공사중 발견,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 충북 제천 장내,(집터 발견)- 단양 수양개,(슴베찌르개, 주술예술품, 현재 수몰)- 청원 두루봉 흥수굴,(완전한 사람뼈, 흥수아이)- 평양 만달리,(인골유적)- 평남 상원 용곡리 동굴(인골화석, 뼈를 납작하게 갈아서 짐승의 머리를 조각한 예술품) 중석기- 간빙기(기원전 1만 년경) - 활 화살 등장, 잔석기와 이음도구 사용- 함북 웅기 부포리, 평양 만달리- 통영 상노대도 조개더미- 거창 임불리 유적- 홍천 하화계리 유적 신석기- 기원전 8000년경- 제주 한경 고산리 유적(여러 토기, 다량의 화살촉, 석기제작 부산물)- 강원 양양 오산리( 흑요석기, 오산리형 낚시바늘, 뾰족바닥 빗살무늬 토기, 토제 인면상)- 부산 동삼동 유적(패총, 조개껍데기 가면, 낚시 바늘, 뾰족 바닥 빗살무늬 토기, 일본산 흑요석기, 부산고구려$ 농사(조 기장), 치레걸이)- 서울 암사동 유적 (생활도구, 농기구, 빗살무늬토기)- 황해봉산 지탑리 유적(빗살무늬 토기, 농사용 도구, 탄화곡물,)- 평남 온천 궁산리 유적(패총, 빗살무늬 토기, 골각기, 농경 관계 유물, 가락바퀴 방추차)-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 무늬토기, 빗살무늬 토기- 부족사회, 씨족, 폐쇄적 독립사회, 족외혼, 경제적교류없음, 평등사회, 모계사회 청동기 시대(부족국가)- 덧띠새김무늬 토기- 기원전 2000-1500년경- 구리에 주석과 아연도 합금, 동물열 장식과 비파형 동검은 북방계통 영향- 충남부여 송국리( 집단취락, 목책, 환호, 탄화미, 송국리형 토기, 거푸집, 최초로 비파형동검 출토, 돌널무덤(석곽묘))- 울산 검단리 유적( 환호, 고인돌, 토기류, 가락바퀴, 그물추등)- 여주 흔암리( 다량의 탄화미와 곡물 발견)- 평북의주 미송리, 평양 남경유적, 등- 고조선의 세력범위(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 거친무늬 거울)-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팽이형 토기, 구멍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송국리식 토기, 공귀리형 토기- 울주천전리 암감화: 사람얼굴, 동심원, 능형문, 지그재그 문양등, 진흥왕이 찾아 오ᅟᆞᆻ다는 명문(울주 천전리 서석: 입종 갈문왕)- 고령 양전동 암각화: 방패형, 동심원 철기(부족연맹)- 기원전 5세기경 - 청동기의 의기화 -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거푸집(한반도의 독자적 제작)- 철제로 무기와 함께 농기구도 제작, 성산패총 야철지(철생산)- 덧띠토기, 검은 간토기-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왕망전(김해패총 발견)- 붓 발견경남 창원 다호리 청동기 철기 시대 생활- 돌도끼 바퀴날도끼 홈자귀, 괭이, 반달돌칼- 조 피 수수 보리 콩 등 밭농사 중심- 벼농사 시작, 목축의 발달(시작은 신석기)- 청동기: 배산임수의 취락, 움집은 직사각형 점차 지상가옥화, 집단취락- 철기 : 부산고구려$ 귀틀집과 반움집, 대규모 마을(시작은 청동기때, 다만 더 크게), 분업의 발달, 정착생활의 규모 확대, 부뚜막 시설(온돌)- 여성은 집안일, 남성은 농경과전쟁, 사유재산제, 계급발생, 군장등장, 선민사상, 정복활동- 철기시대: 독무덤 널무덤(=목관묘=토광묘=움무덤) 덧널무덤 단군과 고조선- B.C. 24c 부터 시작, 하가점 하층문화의 영향을 받음. 홍산문화를 기원으로- B.C. 12c 요서 비파형 동검문화, 고인돌 돌널무덤 비파형동검 미송리현토기 거친무늬거울- B.C. 311-279(4c): 고조선과 연의 전쟁.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2천리의 땅 개척, 5군설치, 만번한을 경계로함.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 옮김.- 연과 대등하게 연호, 부왕과 준왕 부자관계- ‘위략’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회에 응하지 않았다.- 진한교체기 혼란으로 유이민이 조선으로 넘어옴- B.C. 195년,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옴. 박사에 임명되어 100리의 땅을 받음.- 위만은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됨. 쫒겨난 준왕은 익산지역에서 한왕을 칭함- 진번 임둔을 복속, 세죽리-연화보문화(연나라와의 교섭), 명도전과 교역, 널무덤과 세형동검- 한무제와의 대립, 위만조선 침략- B.C. 128: 예군남려와 창해군 설치, 수년후 폐지됨- 위만의 손자 우거왕의 강경한 대립, 한무제침략(B.C.109), 좌장군 순체가 보병으로 수도 공략, 수군 사령관 누선장군 양복의 공격, 조선은 패수접전에서 승리. 1년동안 저항하다 우거왕의 피살로 함락되어 멸망- 한사군의 설치: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을 설치, 이듬해 현도군 설치, 군태수와 현령을 보내 통치, 동방의 경제적 이득을 취함- 토착세력 저항으로 B.C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짐- B.C. 75, 부산고구려$ 현도군이 쫒겨가고 낙랑군은 동부고위와 남부도위를 두게됨 - 왕망이 타도되고 낙랑군 토호인 왕조가 한인태수 유한을 죽이고 독립세력을 일으켰다 편정됨. 이때 동부도위와 남부도위 폐지 - 강성한 한과 예를 견제하기 위해 진번군의 옛 땅에 대방군을 설치(204)-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314, 314년에 각각 소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 - 상서, 사기, 한서(기자→조선후)- 당서 위서 고기 → 단군신화 수록-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성장, 한반도까지 세력확대- 기후명그릇이 고조선의 영역내에는 발견되지 않음- 단군신화 수록문헌(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고조선 수록 문헌( 중국: 관자, 산해경, 전국책, 사기, 한서한국 사서: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평양지역으로 이동한 시점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뉨 (기원전4~3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에 의한 것)- 기원전 4세기 이후 연과 대등하게 왕호, 부왕과 준왕은 부자관계- 위만조선 (기원전 194): 준왕이 위만을 박사에 임명, 왕검성에 쳐들어가 스스로 왕이 됨- 위만: 상투와 조선옷, 박사임명, 토착에력중 고위직, 조선국토 그대로- 철기문화의 본격적 수용, 철기가 한반도 전역 확대, 중계무역 발달, 임둔과 진번을 복속 - 황/태자/비왕/상/대신/경/장군 등의 명칭, 상, 장군은 중앙통치의 주요 직능, 상, 경은 지방의 책임자, 군사조직 체계- 한 무제가 무력침략을 감행(기원전 109) 1차접전(패수)에서 대승, 1년 동안 5차례에 겅친 한의 침략에 대항, 지배층의 내분으로 왕검성이 함락(기원전 108)- 한군현 설치(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 낙랑군의 남부 지역을 따로 분리시켜 대방군이 설치 낙랑군과 대방군의 축출이전까지는 중국 - 한 군현- 삼한-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교역이 활발 부산고구려$ - 8조법 , 한서지리지의 3개 조목의 내용만 전해진다. 보복법, 관습법 농경사회, 남성중심, 사유재산제 부여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성장- 대사위거는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에 대한 군사행동을 실시하자 현도태수 왕기를 불러 기존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면서 병참지원을 함.- 1세기초에 왕호를 사용 중국과 외교 3세기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 5세기 후반 문자왕에 의해 고구려에 편입, - 사출도 적장자 세습제, 반농반목, 명마 적옥 담비와 원숭이 가죽- 1책 12법 ( 생명중시 연좌제 형벌노비제 사유재산제, 가부장제 일부다처제- 순장, 12월 영고 , 우제점법, 형사취수제, 흰옷, 은력 사용- 대사 대사자 사자: 대사를 내외 행정실무를 관장한 최고 관직이며 가층을 포괄하는 국정실무의 최고관리로 보기도 함.- 오곡생산,(보리 조 콩 기장 수수 팥), 화전농업, 한전농법(마른땅에 물), 목축업(반농반목)- 식사할 때 조두(굽있는 잔)사용. 열고때 형옥을 판단하여 죄수를 풀어줌, 성책을 둥글게 만들어 마치 감옥과 같다(원책유구),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 도장에 예왕지인이란 글귀(본래 예맥족의 한 집단으로 보임), 동명이 시조.- 왕망 때 부여: A.D.9년(1세기), 왕망이 신을 세운 후 외이왕들을 후로 강등, 부여와 고구려는 당시 국가단계에서 왕을 칭하고 있었음- 후한과 밀접한 외교관계- 주몽~태조왕때 까지 고구려와 교섭, 요동군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 136년 부여왕이 친히 후한의 수도에 가서 조공, 이례적으로 접대- 금루옥의(옥갑) : 후한과 적극적인 유착- 2세기말~3세기초: 부여와 공손씨의 혼인동맹- 위가 공손씨를 멸망 시킨 뒤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 침공, 부여의 대사 위거는 위군을 환영하고 군량을 부산고구려$ 제공- 서자인 마여왕의 즉위, 6세에 오른 임금 존재(왕권 강대)- 285년 선비모용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함- 의려왕의 자살, 부여 중심세력은 옥저로 피난- 의려의 뒤를 이어 의라가 왕이됨, 복국함, 그러나 모용선비의 약탈 지속- 원래의 중심지였던 녹산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모용선비의 위험에 노출- 전연 모용황은 345년 고구려의 남소성을 침, 346년 부여 공격-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410년 동부여 복속, 모두루 묘지에 의하면 북부여도 비슷한 시기 복속- 494 부여 멸망 고구려- 압록강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현도군 졸본 지방에 자리-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면서 평야지대로 진출 5집단 연합을 토대로 발전 - 왕 아래의 대가는 상가/고추가/대로/패자등으로 불림,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리고 있다- 감옥이 없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회의를 통해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 삼았다- 부경이라는 창고를 운영 - 1책 12법, 10월 동맹, 조상신숭배, 계루부와 소노부에서는 자체적으로 종묘 및 영성과 사직에서 제사를 지냄- 서옥제(데릴사위제) : 봉사혼 제도 노동력 중시, - 형사취수제: 보조적 결혼제도- 부여의 유이민 계열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이 결합하여 형성.- 연노부가 주도집단이었다가 주몽이후 계루부가 주도 집단- 대로 또는 패자는 수상이었을 것.-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며 소가는 절풍을 쓴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 평의하여 사형에 처한다. 남녀가 결혼하면 죽어서 입고 갈 수의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낸다. 말은 체구가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태조왕(궁) 4년(56): 동쪽으로 옥저를 복속시켜 후방기지로 삼음 - 태조왕 부산고구려$ 53년(105): 요동을 공격하여 여섯현을 탈취하고 69년(121)에는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죽였다. - 차대왕 신대왕(백고) 때에도 요동진출이 계속됨. 신대왕 8년(172)에는 국상 명림답부가 굳게 성을 지키다 퇴각하는 적군을 좌원에서 섬멸- 동천왕 위궁은 좋지않게 묘사됨, 서안평을 공격하였다가(242)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수도의 황도성이 함락되고 이듬해 현도태수 왕가의 공격을 받아 동천왕이 멀리 동해안의 남옥저지역까지 피난하는 고초를 겪음. 옥저- 읍군 삼로- 어물과 소금등 해산물이 풍부 토지가 비옥 - 민며느리제(예부제): 일종의 신부 매매혼(가부장적)- 골장제(두벌묻기 세골장 가족공동무덤)- 대군왕이 없고 읍락마다 장수(=거수=주수=군장)가 있어 스스로 삼로라 한다. 낙랑 동부도현 관할의 영동 7현중 하나인 옥저현의 중심지역이었다.- 평양의 목곽묘에서 옥저현의 부조예군 인장이 발견- 목곽에는 죽은 사람의 수대로 그 사람의 형상을 목각하여 안치하였으며 토기에 ᄊᆞᆯ을 담아 문입구에 매달았다(영혼불멸사상)-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전을 잘했다.- 고구려는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동예- 읍군 삼로- 불내예후만이 후국의 면모를 유지(중심세력)- 누에를 이용하여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 과하마, 반어피, 단궁 등이 생산, 10월에 무천, 족외혼, 책화, 철자 여자 모양인 가옥-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냈다.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있다.- 남녀모두 곡령(묵둘에가 둥근 옷)을 입는데 남자는 은화를 옷에 꿰매어 장식하였다.- 철자 여자 모양의 집터에서 생활하였고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새 집을 지어 살았다. 3장이나 되는 차을 만들어 부산고구려$ 사용했으며 보전에 능숙했다.-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다.-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 주옥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삼한- 진이라는 토착세력, 마한의 목지국의 지배자가 진왕으로 추대되에 삼한전체를 영도(영도세력) - 위만조선의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하다가 받아들여지지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전해짐- 마한은 54개의 국으로 나뉘어져있었으며 마한의 왕이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영도함.- 국읍(중심지, 주수1명 천군1명(제천행사주도)), 별읍(소도, 천군은 무속에 대한 제사를 지냄), 읍락으로 이루어져있다.- 지배자: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제정분리와 소도, 제사장 천군 - 벼농사 발달, 오곡과 밤의 재배, 저수지 축조, 농사에 축력이용, 철생산 활발, 누에치기와 명주생산 - 두레, 5월 수릿날 10월계절제- 반움집 귀틀집 토실, 주구묘, 구슬을 귀하게 여겨 장식, 문신을 하기도 - 대외교역의 주요 대상은 한군현과 왜. 중국 군현을 통한 간접적인 조공무역- 해남 군곡리 패총: 왕망때의 화천발견, 한중일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 하호가 노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일반 백성과 같은 성격- 장유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줄 몰라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나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상투를 드러내고 베로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 큰 밧줄로 나무막대를 매달고 소리를 지르며 작업한다. - 큰 밤과 가는꼬리 닭, 주호(지금의 제주도로 봄)에서는 머리를 삭발하고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다. 마한인은 토착인이었던데 비해 진한인은 북방 유이민이었던 듯-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장사지냄 ​​#공기업한국사#공무원한국사#한국사능력시험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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