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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푸스 신염_6.12. 이사 후 첫 외래(홍반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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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LO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24-09-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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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와 WBC247 공동 서신에서 죄데이비드 엠 모핏T&T Clark Companion to the Doctrine of Sineds by Keith L. Johnson and David Lauber[모핏 박사(듀크 대학교 박사)은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스에 있는 세인트앤드류스 대학교에서 신약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의 저서 Atonement and the Logic of Resurrecti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는 2013년 Manfred Lautenschläger Award for Theological Promise를 수상했다.] ​​공통된 주제: 죄 히브리서와 일반 서신(여기서는 야고보서,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 유다서를 지칭함)[1]은 죄의 문제를 다루면서 몇 가지 공통된 주제와 가정을 공유한다. 다섯 텍스트, 모두 권면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 서신의 저자들은 이미 예수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내부자들에게 서한을 보낸다. [2] 따라서 이들 서신의 권고는 대부분 이 믿음과 신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굳건히 지켜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본문에서 죄의 중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예수와 믿는 공동체로부터 돌아서거나 과거의 상태와 과거의 행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회개이 서신들 각각은 또한 무질서한 욕망의 방향 전환을 강력하게 촉구하고자 한다. 죄는 사람의 주된 방향이나 성향이 현재의 가시적인 세계를 향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악한 시대의 논리와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욕망하는 경향이 있다. 이 구절들은 그 대신 미래 시대에 하나님과의 방해받지 않는 교제 속에서 끝없는 삶을 향하여 방향전환할 때, 인생에 대한 올바른 방향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가오는 영원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러한 권면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그분이 하신 약속을 얻고자 하는 이러한 욕망이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바르게 질서 정연하게 정돈된 삶, 즉 신실한 삶은 예수의 구원 사역으로 가능해진 미래에 받을 유업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과 일치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하심, 승천은 단순한 구원의 수단 그 이상이다.예수 안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들은 또한 죽음이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것을 결정하거나 한정하지 않는 신적/천상의 논리를 드러낸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교제의 축복과 영광은 고난의 반대편에 서 있다. 따라서 죽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로 인해 고통과 죽음이 초래될 때에도, 장차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거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전에 버렸던 죄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상속 재산을 상실당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들의 윤리적 논리는 종말론적 감수성이 그리스도인 정체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미친 영향을 어느 정도 증명한다.​​신앙의 안정과 성숙함일반적으로 이들 본문들은 안정성과 성숙함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죄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및 그분에 대한 자신의 확신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자주 바뀌는 신념, 즉 쉽게 받아들이거나 버리는 신념과 관습은 죄를 낳는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성숙의 표시이다. 이 문서들에서 고난은 자신의 신앙적 패기를 검증하는 시험장으로 여겨진다. 고난을 견뎌낸다는 것은 성숙해지는 것이고, 더 안정되고 무질서한 욕망에 덜 취약해지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인데, 이는 다시 미래보다는 현재에 더 우선수위를 두기 때문이다.​이어지는 토론에서 우리는 이 서신서들이 죄를 특징짓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서신들을 살펴본다. 이 본문들은 죄에 대해 체계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반응과 경고에 대해 서두에서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서와 야고보는 죄를 낳는 근본적인 요인들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연구는 죄의 논리에 대한 명백한 설명보다는 이 문서들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권면으로부터 추론된 함축된 의미에 더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부터 시작하는데, 히브리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여기에서 살펴본 다른 편지들과 구별된다.히브리서히브리서는 원래 설교자가 본문을 작성하여 서신으로 보낸 고대 설교이다(참조, 13:22-25). [3] 일반 서신과는 달리(아마도 유다서를 제외하고), 히브리서의 서신적 결론과 본문 전반에 걸친 특정 세부 사항 (예: 10:33-3412:4)에서 저자와 청중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음을 나타낸다. 이는 히브리서가 바울의 편지처럼 원래 특정한 어려움에 직면한 특정 회중을 위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저자가 강론 전반에 걸쳐 자주 하는 죄에 관해 말할 때, [4[ 그는 자신과 그들이 알고 있는 회중의 특정한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의도가 거의 확실하다. 작가가 본문의 원래 수신자와 공유한 지식은 아마도 그가 수정하려는 문제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저자는 자신이나 청중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거의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신원, 원래 청중의 구성과 장소, 작성의 정확한 날짜에 대해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5] 본문에 있는 제한된 증거를 통해 설교의 그럴듯한 배경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첫 번째 독자들이 직면한 구체적인 상황과 문제들이 지금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죄 개념의 일반적인 윤곽은 그의 짧은 '권면의 말'(참조, 13:22)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지속적인 현실성을 강조하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1:1-2). 저자는 설교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성경의 다양한 진술의 말씀하시는 분으로 밝히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를 계속한다(예: 1:5-133:7-185:5-68:8 –10:30참조). 때때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권고한다(특히 3:7~1512:5~6). 아마도 회중은 아마도 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들의 음성을 통해(12:25참조 3:1)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로부터 경고를 받고 있을 것이다.​저자는 내부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회중이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에 적절하게 반응했음을 강조한다. 특히 그들은 이전에 예수의 초기 제자들로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2:1-4).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헌신의 결과로 과거에 박해를 받고 견디기도 했다(10:32-34참조, 6:10). 그들은 이전에 예수에 관한 보고를 믿었기 때문에, 저자는 그들의 현재 문제의 중심 뿌리를 아피스티아, 즉 불신, 더 문자적으로는 믿음의 부족/불신앙(a-믿음)으로 식별한다. ​그러한 불신앙의 주요 징후는 다음과 같다:1) 공유된 고백에 대한 헌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6](예: 4:1410:23참조 2:13:14)2) 신실한 공동체를 떠나는 것(특히 10:25참조 6:4-6) 3) 예수와 그가 중재하는 언약의 피와 성령을 멸시함(10:29). ​이러한 묘사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고 대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서 죄는 주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개념화된다.​저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에 호소하는데, 특히 이것이 특히 죄를 예시하는 시편 95편을 통해 중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유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원시적인 안식과 관련되어 있다(4:4-7). 그들은 대신 다른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다(참조, 민 13:27-14:10). 그 에피소드와 유사한 방식으로, 히브리서는 광야에 있는 회중이 궁극적이고 약속된 유업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위치에 있다. [7] 과거에 광야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다(3:164: 2)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아피스티아였다(3:19).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약속된 유업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3:124:11) 불순종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본보기는 청중이 지금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 역시 약속된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참조, 6:4-6).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그처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이러한 믿음의 결핍은 주로 하나님과 그분이 그의 자녀들에게 제공하시는 약속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로 표현되지만, 그러한 불신과 죄의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고보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정욕이나 욕망을 죄의 근본 원인으로 식별한다(야고보서 1:14-15참조. 벧전 2:11벧후 1:4유다서 16).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해 명시적으로 대답한 곳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현재의 인간 상태에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으며, 죄가 있고 불결한 양심의 지배를 받는다. 서로 연관된 이 두 가지 힘은 아피스티아와 죄의 주요 동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여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기보다는 그분을 향해 움직여 그분의 뜻을 행하려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정화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구원은 인류가 죽음의 권세와 이 권세를 휘두르는 자, 즉 마귀에게 특별히 복종하기 때문에 필요하다(2:14).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인류는 죽음의 두려움에 영원히 종노릇하는 상태로 살고 있다(2:15). 저자는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왔다는 바울의 주장(롬 5:12-19)을 결코 명백하게 확인하지 않으며, 강론의 어디에서도 아담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상의 아들이 시편 8편에 따라 이제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창조물 위에 높임을 받은 특별한 인간 예수라는 그의 주장은 그가 아담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참조. 히 2:5-18). [8] 저자는 아담의 타락 사상을 왜 인류가 마귀에게 예속되고 죽음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가정할 가능성이 높다.​바울과 다른 신약성경의 목소리에 따라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이 마귀를 물리치고 죽음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는다(2:9, 14-159:15).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 부활의 ​​중요성은 현대 학계에서 종종 간과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9] ​따라서 다음 두 가지가 강조하는 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 인간으로서 예수가 하늘 영역의 천사들보다 높아지는 논리2) 히브리서는 하늘 성막에서 형제자매들을 위해 제물을 드리고 중재하는 예수의 대제사장 사역(7:23-268:1-69:24-26참조, 2: 17~18)​이 두 가지 모두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예수께서 죽음과 마귀를 물리치셨다는 저자의 주장에 필수적임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2장 9절과 2장 14~15절은 특히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그리스도 사건의 더 큰 이야기의 핵심 요소임을 확인한다. [10]​다른 한편, 저자는 인류가 특히 양심의 차원에서 죄의식과 불결함의 상호 연관된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믿는다. 레위의 희생 제도는 죄, 죄책감, 불결함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명인 피를 조작하고 드리는 것은(예를 들어, 레 17:11, 14참조, 창 9:4신 12:23) 제사 드리는 사람이 정결함과 용서를 얻기 위해 필수적이었다(예, 레 4:20, 2614:19–20).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불결함으로 오염된 지상 공간에 거하기를 거부하시며, 불결한 것이 그분의 임재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언약 관계를 유지하려면 순결과 용서가 필요했다. 희생의 중심 목표 중 하나인 용서와 정결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의 백성 가운데 머물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임재 가까이에 거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1]​ 히브리서는 이러한 희생 논리를 사용하여 예수의 희생과 레위기에 규정된 욤 키푸르(Yom Kippur) 제사 사이의 유비 관계가 있음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 희생을 묵상하면서 저자는 욤 키푸르의 속죄 제물의 가장 핵심적인 속죄 요소 중 하나, 즉 대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생명을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전달하는 것을 강조한다(참조, 레위기 16:15~16).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늘을 통과하셨다(4:14).​저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피를 드리는 제사장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는 데 제한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9:10, 13, 22). 저자는 레위기의 규정에 비유하여, 예수께서 하늘을 통과하여 하늘 WBC247 지성소에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신 행위가 어떻게 그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용서와 정결(즉, 희생의 속죄)을 가져왔는지 설명한다( 9:14참조. 1:3)​더욱이, 예수님의 정결하시는 능력은 양심까지까지 확장되는데, 저자는 레위인의 희생이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늘의 대제사장인 욤 키푸르 희생을 행하심은 그분이 중보하시는 언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 언약 하에서 제한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함께 거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얻으신 용서와 정결케하심은 그들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영원한 기업에서 그분의 면전에 거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12]​계속되는 논의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결함의 노예가 된다는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압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나님께 다가가서 그분이 제공하시는 약속된 유업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죽음과 불순함은 사람들이 돌아서서 죄를 짓게 만든다. 즉, 아피스티아와 그 발현은 죄악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개인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도록 허용될 때 번창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음을 회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감을 고백할 것을 호소한다. 예수님 덕분에 이제 완전한 속죄가 현실이 되었다.​그러므로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에게서 돌아서도록 강요하는 방향에 따라 생활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얻으신 속죄의 현실에 따라 살도록 독자들에게 권고한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으로 인해 그들은 구속받고, 용서받고, 정화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고 천사들과 함께 예배한다(특히 12:18~13:21). 지금도 그들은 예수님만이 가셨던 곳,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갈 수 있다(4:16). 그러므로 그들은 끈기 있게 고백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된 유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했던 것처럼 외면하는 대신,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행한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모범을 따라야 한다(참조, 5:7-10, 11:1-12) :2). 이런 식으로 그들은 아직 볼 수 없는 현실에 따라 생활하면서도 참되다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행동/생활 방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사이의 일관성이 히브리인의 피스티스, 즉 믿음, 더 나아가 신실함을 이해하는 핵심에 놓여 있음을 나타낸다. 믿음은 무신론과 죄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믿음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믿음을 위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초점은 죽음과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현세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이로써 믿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결한 죄에 대한 기본 논리에 도전하고 대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만물이 아들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 아직 온전히 보이지 아니하는 현 세상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예수를 바라보며(13:20), 사망과 더러움이 말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 말씀으로, 그의 자녀들에게 그의 면전에서 영생을 약속하시는 분은 신실하시다.야고보서야고보서에는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히브리서와 다른 일반서신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종말론적 심판, 내세의 소망, 주의 재림에 부합하지 않거나 적절하게 지향되지 않는 행위와 죄를 연결한다(참조, 1:125:7-9). [13] 히브리서와 달리 야고보의 더 일반적이거나 전형적인 관점은 죄에 대한 더 넓은 개념과 관련이 있다. [14] 따라서 그는 특정 죄에 대한 부분적인 목록을 제공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죄는 대상을 향한 보편적인 인간 욕망(에피투미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유혹과 악을 행함(1:14-154:1-3). ​또한 히브리서와는 달리 이 서신은 죄를 위한 속죄에 대한 희생적 설명에 명시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야고보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죄의 용서는 중보기도와 고백(5:15-16), 그리고 방황했던 자들을 다시 불러오는 일(5:19-20)과 연결되어 있다. 야고보는 정결 개념과 하나님과의 친밀함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하지만(4:8-10), [15] 예수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서신에서는 하늘의 지혜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악으로 기울어지는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16] 야고보서는 히브리서에서처럼 믿음이 전진한다는 은유를 발전시키기보다는, 베드로전서처럼 도덕적 삶의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 끈기 있게 기다리는 개념을 사용한다(예: 5:8).​야고보는 악을 향한 인간의 성향에서 죄의 뿌리를 확인한다.선천적이고 무질서한 특정 욕망을 죄의 근원으로 보는 이러한 식별은 '악한 성향'(yeṣer hara)이라는 유대인의 개념과 밀접하게 일치한다. [17] 따라서 야고보는 유혹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타고난 악한 성향(1:13-15)과 그것에 호소하는 마귀로부터(4:7) 비롯된다고 단언한다. 이 성향을 따르는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1:15).​서신의 중심 구절(3:13-4:11)에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이기적인 야심, 탐심, 시기, 교만과 같은 무질서한 욕망에 따라 살지 말라고 경고한다(3:14, 164:1- 6). 이는 세상의 지혜나 논리와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3:14-16). 이 길은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반대를 받으며, 결국 심판이 올 때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예: 4:1-6, 11-12). 믿음은 대신 하나님과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향하게 한다(3:13, 17-18). 그러한 삶의 열매는 현재 쉽게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종말론적인 신앙 지향은 현재의 위로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1:10-115:1-5). 믿음은 하나님과의 교제, 다가오는 심판의 축복, 하늘의 지혜에 따라 생활하는 데 대한 보상을 보장한다(예: 1:123:184:6-105:7-8).​위에서 언급했듯이 야고보는 죄에 대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표현을 자세히 설명한다.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품성의 불안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다. ​이러한 주제는 서신의 시작 부분(1:6-8)과 야고보가 죄인들이 하나님과 공동체에서 멀어지기 쉽다고 말하는 끝 부분(5:19-20)에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안정의 문제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은 시련과 유혹 가운데서 인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예: 1:2-4,124:7-8) 강조하는 점에서 서신 전체를 관통한다. 믿음과 말과 행동 사이의 삶의 일관성과 지속성과 관련이 있다(예: 1:22-242:13:10-12). 야고보서의 성숙 또는 완전(teleios)은 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즉 자신의 종말론적 소망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18] 이는 성숙한 사람이 신앙에 더 확고하고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큰 통제권을 갖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성숙한 신자는 자신의 정욕을 다스리므로 죄를 짓는 경향이 적다.​서신의 본문은 일반적으로 죄의 두 가지 주요 범주, 즉 부적절한 말과 자신과 궁핍한 사람들과 관련된 부의 부적절한 사용과 관련된 일련의 느슨하게 구조화된 토론을 통해 진행된다(1:26-27). 마지막 요소를 먼저 취하면 야고보서 2:1-13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고 영합하는 것이 회중의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며 죄라는 것을 보여준다(2:9). 그러한 편파성이나 편애를 보이는 것은 악에 대한 성향, 세상의 논리와 가치, 현세에 대한 근시안적인 지향에 맞춰 사는 것이다. 미래의 구원을 지향하고 확신하는 진정한 믿음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를 사용한다(2:14-26). 이런 생활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일치한다(2:8).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하여 자신의 이익을 증대하는 데에만 사용된 부는 곧 사라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자신의 부에서 궁극적인 안전을 찾지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5:1-6).​야고보서 3:1-12과 4:11-17은 특히 무질서한 욕망이 죄악된 말을 낳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야고보는 혀가 세상에서 악한 욕망이 실현되는 주요 통로 중 하나라고 말한다. 혀는 비록 몸의 작은 부분일지라도 악의 문이자 도구이다. 욕망은 사람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혀는 축복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3:9),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으며(3:11), 자랑을 통해 오만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4:16). 그러므로 혀를 제어하는 ​​것은 유혹에 굳건히 서고 악한 성향을 저항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요컨대, 야고보서 전체에서 죄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욕망에 의해 통제된 결과로 식별된다. 이는 불안정, 의심, 이중 마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를 소중히 여기고 남용하며,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신앙 공동체에서 멀어지기 쉽다.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형벌과 보상을 모두 포함하는다가오는 심판을 방향설정하여 살게 한다.​이러한 방향설정을 통해 우리는 시련과 유혹을 견디고 악마에 저항할 수 있으며, 한마디로 악에 대한 성향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지금 여기의 가치에 비해 직관에 어긋난다. 시기와 이기적인 야심에서 말하는 대신, 하늘의 지혜는 온유하고 평화롭고 자비로운 말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믿음은 재물을 축적하거나 부자들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예수에 관해 명시적으로 거의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강조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말씀하시고 구체화하신 지혜를 반복적으로 반영한다. [19]베드로전서베드로전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일부로 특징지어지는 신자들의 회중에게 자신을 언급한다.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이 편지도 독자들이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 묘사한다. 이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다(1:3, 22-25). 그들도 세례를 받았다(3:21). 더욱이 이 편지는 현재 이스라엘의 언어와 상징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다시 설명되고 있는 이방인 신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1-22:5-9).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제 그들 자신도 이방인 가운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특히 2:10~12참조 4:3~4).​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의 구원은 가까운 장래에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받기를 고대하는 유업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예: 1:3-5, 134:7). 그러나 이 편지에 나오는 지향 개념은 히브리서의 개념과 다르다. 히브리서는 일반적으로 약속된 유업을 향해 전진하는 측면에서 도덕적 삶을 제시하는 방향적 은유를 전개하는 반면, 베드로는 야고보처럼 유업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인내를 격려한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 따라 베드로전서는 독자들에게 미래의 소망과 다가올 심판의 현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 것을 권고한다(1:13-17).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방향설정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그 합당한 근거로 삼는다(1:21). 이 모든 것은 야고보처럼 과거에 사람의 삶을 지배했던 무질서한 욕망이나 정욕(에피투미아, 1:142:114:2-3)이 이제는 그들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실제로 베드로전서 역시 정욕에 죄의 부리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이고, 마귀의 활동과 마귀를 저항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있다(5:8-9). 다가오는 심판(1:174:4-5)을 고려하여 정욕에 종노릇하는 삶은 '무지'(agnoia, 1:14) 가운데 사는 삶이며 '공허한 행위'(mataia anastrophē, 1:18)로 그 삶이 특징지어진다. 베드로전서에서 공동체의 사랑은 수많은 죄를 덮는다(4:8야고보서 5:20 참조). 이는 아마도 공동체의 맥락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행동할 때 죄가 근절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21]​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야고보의 주장을 뛰어넘어 죄가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과 그에 따른 신자의 새로운 정체성, 즉 제사장 연합을 포함하는 정체성과 어긋난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신 것을 연상시키는 언어(예: 출 6:6신 7:8)에서 청중은 예수의 피로 그들의 헛된 길에서 구속(elutrōthēte)되었다(1:18-19). ). [22] 더욱이 베드로전서에서 정욕/욕망의 인도를 받는 것과 신적 거룩함을 이루는 순종(1:14-16) 사이의 대조는 베드로가 독자들에게 부여하고 가르치는 정체성과 연결된다. 이미 예수님께서 뿌린 피에 대한 언급(1:2)에서 제단에서의 언약의 취임식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예: 출 24:3~8). [23]​'은혜'와 '평화'라는 첫 번째 축복(1:2)과 이어서 하나님의 '자비'(1:3)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제사장의 특별한 축복을 생각나게 한다(민 6:22-27 참조). 더욱이, 성전과 그 봉사에 대한 암시가 가득한 언어로 독자들은 신령한 집으로 건축될 산 돌들과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불린다(2:5, 9). 그러므로 베드로가 편지 수신자들에 대해 거룩하고 순결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예: 1:2, 15, 223:2, 15). 그러므로 계속해서 정욕에 복종하는 WBC247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대조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24]​거룩한 삶과 독자가 미래의 축복과 구원을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존재하지만(예: 1:14-173:9-12),베드로는 또한 외부인에게 증거하기 위해 내부인이 거룩하고 죄를 피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뿐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 차별 없이 이방인과 똑같이 사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것은 한 사람을 구별하고 외부인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2:11-12, 153:164:2-4). 거룩함과 제사장의 정체성은 사람이 세상의 규범, 논리, 가치와 구별되어 달라야 함을 의미한다.​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죄는 악을 향한 성향의 지배를 받는 데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러한 생활은 새로운 제사장 신분의 거룩함과 일치하지 않으며, 죄인과 의인 모두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예: 1:9, 13, 174:17-18). ).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1:5)과 그들을 무지하고 무익한 생활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1:18-19)은 이제 그들이 그러한 행위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을 따라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을 위해 자신을 세우셨다(2:21-23).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다시 죄에 복종하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베드로후서와 유다서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부분들 사이의 매우 밀접한 유사성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출처로 사용했다고 결론짓는다. [25] 다른 일반서신과 마찬가지로 이 두 편지도 내부자들의 회중에게 기록되었다(참조, 벧후 1:1-8유다서 1-3 절). 베드로후서는 여기에서 논의된 모든 본문과 일치하게 심판과 완전한 구원을 아직 오지 않은 일로, 따라서 지금 사람이 사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으로 상상한다(벧후 3:10-14, 17참조, 1:11). 덜 발전되었지만 이와 동일한 관점에 대한 힌트가 유다서에도 나타난다(유다서 14~15, 20~21, 24).​이 두 본문에 나오는 죄는 두 저자가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특정 개인과 연결되어 있다. 이 죄 많은 사람들은 편지에서 언급된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공동 잔치에 참여한다(벧후 2:13유 12). 베드로는 그들을 올바른 길로 출발하여 죄를 버리고 예수님에 대해 배운 사람들로 묘사한다(벧후 2:15, 20-22). 그러나 이제 그들은 ‘거짓 교사들’로 알려졌다(벧후 2:1). 유다는 그러한 사람들을 다소 다르게 묘사하여 그들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속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회중 가운데 '잠입'(페레이세두산)했다(유 4절). 신자들의 공동체에 합류하려는 원래 동기가 무엇이었든, 두 편지는 이제 어떤 식으로든 예수를 부인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베드로후서 2:1유다서 4). 이는 아마도 신자라는 그들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그들의 죄악된 행위가 예수를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6]​두 편지 모두 이들 개인의 특징인 죄 많은 태도와 행동을 자세히 설명한다.그들의 결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인 죄와 탐욕이다(베드로후서 2:2-10참조, 유다서 4, 6-7, 11-12, 16). 베드로후서는 그들이 공동체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성적인 죄에 빠지게 한다고 말한다(벧후 2:14, 18-19). 그들의 탐욕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만든다(벧후 2:14-15참조. 유 11-12, 16). 더욱이 그들은 권위와 천사 같은 인물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벧후 2:10유 8-10). 두 편지 모두 지역 사회에 불화를 퍼뜨린다는 데 동의한다(벧후 2:1유 19). 그들은 죄악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으로 왜곡한다(유다서 4참조, 벧후 2:19).​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처럼 그러한 사람들의 죄는 그들의 정욕의 억제되지 않은 영향력과 연결되어 있다(에피투미아, 벧후 3:3유 16, 18). 더욱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욕에 호소하여 그들을 죄에 빠지게 하고 그들 자신이 노예가 된 것처럼 그들을 노예로 만든다(벧후 2:14, 18-19, 참조, 2:2-3).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다른 일반 서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욕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안정한 사람들로 식별한다.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그들을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에 비유한다(벧후 2:17). 유다는 그것을 바람에 의해 밀려다니는 구름이나 파도에 비유한다(유다서 12~13). 그들이 유인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불안정한 영혼들'이다(psuchas astēriktous, 벧후 2:14). 그들의 앞에 있는 끝은 멸망이다(벧후 2:33:7참조, 유 5-7, 13).​그러나 여기에서 논의된 다른 본문과는 달리, 베드로후서에 언급된 죄는 부분적으로 예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연한 것으로 보인다. [27]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이들 개인의 죄악된 행동과 예수의 재림에 대한 의심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한다. (베드로후서 3:3-4). 베드로후서는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파루시아와 최후의 심판이 예상만큼 빨리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하시는 데 더디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벧후 3:8–9).​다시금 자신의 열정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이러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유혹에 빠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되는 시간 동안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지금 여기에서 열정과 만족의 논리에 맞서 싸우겠다는 헌신을 계속할 믿음이나 자신감이 없다. 그들의 믿음은 빠르게 계속되는 삶의 일상적 현실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약속을 심판하시고 성취하신 방식을 바라보기보다 그들의 열정이 그들을 다시 지배하게 되었다.결론위에서 연구한 각 본문은 고유한 내용을 갖고 있지만 죄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죄가 인간의 현재 세상에 대한 경험의 논리와 가치를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의 십자가형, 부활, 승천에서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높이는 데서 비롯된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한다. 대조적으로, 마지막 날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다가올 세상을 지향함으로써 더 넓은 문화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다. 그들은 또한 죄가 무질서한 욕망의 결과라는 데 동의한다. 히브리서에서 이것은 주로 죽음과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일반서신, 특히 야고보서에서는 이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에 통제를 받는 것은 죄악된 행동을 초래한다. 이 모든 서신들은 일치하여 죄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신자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 각 구절에 따르면 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상속받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심판과 멸망을 초래한다.각주1 요한 서신에 대한 논의는 Gary M. Burge의 이 책에 있는 에세이를 참조.2 데일 앨리슨(Dale Allison)은 최근 야고보서가 회당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서가 신자들의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ICCLondon: Bloomsbury, 2013) 33–50 (cf. his earlier article ‘The Fiction of James and Its Sitz im Leben,’ RB 108 (2001) 529–70).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야고보서 1:1에 있는 예수의 이름과 '주'라는 칭호의 연결이 이 본문이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추정을 만든다는 데 동의한다(참조, 야고보서 2:1[앨리슨은 여기서 예수에 대한 언급이 텍스트 수정]).3 히브리서의 설교적 특성에 대한 논거와 증거에 대한 간결한 요약을 보려면 특히 참조. Cockerill, G.L., The Epistle to the Hebrews (NICNTGrand Rapids: Eerdmans, 2012) 11–16.4 '죄'언어(즉, 하마르트 어근에 기초한 단어)는 히브리서 27절에 29번 나온다. (참조 1:32:173:13, 174:155:1, 37:26, 278:129:26, 28 (2x)10:2, 3 , 4, 6, 8, 11, 12, 17, 18, 26 (2x)12:1, 3, 4(10:6, 8, 18, 13:11은 범한 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LXX에서 페리(테스) 하마르티아스로 번역되는 소위 '속죄 제물'을 언급한다는 점에 유의.) 다른 관련 단어, 문구 및 개념도 사용되었다(예: 파라바시스, 범법(2:29:15)파라코에, 불순종(2:2)파라피크라스모스, 반역(3:8, 15참조) 3:16의 동족사 parapikrainō)sklērunein tēn kardian, 마음을 강퍅하게 하다(3:8, 154:7참조, 3:10, 12, 1310:22)6, 113:1811:31의 동족어 apeitheō 참조), 죽은 행위(6:19:14), 아그노에마(agnoēma), 무지에서 범한 행위. (9:7)).5 Attridge, H.W.,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lbes(HermeniaPhiladelphia: Fortress, 1989) 1~13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참조.6 저자는 강론에서 특정 고백을 세 번 언급한다(3:14:1410:23). 이 중 두 구절, 4장 14절과 10장 23절은 고백을 굳게 지키라는 권면의 맥락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13:15에서 '그의 이름'을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의 이름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이 고백의 전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세 가지 요소는 여기에 예수의 대제사장 신분에 대한 확언이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1) 저자는 3장 1절에서 예수님을 '우리 신앙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른다. 2) 고백을 포기하지 말라는 권고(즉, 5:1-10:20)를 묻는 4:14 와 10:23 사이에 있는 자료는 주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와 봉사에 대한 확장된 논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 히브리서 7장의 논증은 예수가 유다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한다(특히 7:13-14). 그러므로 고백을 지키라는 권고가 반복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예수가 대제사장이었다는 이전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가 레위 지파의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러한 의심과 거부의 핵심일 수 있습니다. 이 입장에 대한 더 긴 논의를 보려면 참조: Moffitt, D.M., ‘Jesus the High Priest and the Mosaic Law: Reassessing the Appeal to the Heavenly Realm in the letter “To the Hebrews”,’ in Problems in Translating Texts about Jesus: Proceedings from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nual Meeting, 2008 (eds Caspi, M. and Greene, J.T.Lewiston, NY: Mellen, 2011) 195–232.7 이 점에 대한 훌륭한 탐구를 보려면 Thiessen, M., 'Hebrews and the end of Exodus,'NovT 49 (2007) 353–69를 참조.8 몇몇 사람들은 히브리서 2장에서 아담에 대한 암시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e.g. Bruce, F.F., The Epistle to the Hebrews, rev. ed. (NICNTGrand Rapids: Eerdmans, 1990) 72–4Héring, J., L’Épitre aux Hébreux (CNT 12Paris: Delachaux &Niestlé, 1954) 34Gäbel, G., Die Kult Theologie des Hebräerbriefes: Eine exegetische-religionsgeschichtliche Studie (WUNT 2/212Tübingen: Mohr Siebeck, 2006) 142–4Marcus, J., ‘Son of Man as Son of Adam, Part 1,’ RB 110 (2003) 38–61, esp. 52–5. For my own defense of the importance of Adam in Heb 2 see Moffitt, D.M., Atonement and the Logic of Resurrecti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NovTSup 141Leiden: Brill, 2011) 130–44.9 특히 참조. Moffitt, Atonement, 1~43.10 저자는 설교 전반에 걸쳐 다른 어떤 희생 의식이나 역할보다 예수의 욤 키푸르 희생과 대제사장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히브리서 2장 14~15절과 9장 15~18절에서 예수의 죽음, 구속, 언약의 시작 사이의 연관성은 그가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 사이의 역사적, 개념적 연관성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서에서 유월절에 대한 유일한 명시적인 언급은 11:28에서 저자가 유월절 양의 피가 '장자를 멸하는 자'(ho olothreuōn ta prototaka)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마귀의 종노릇하는 권세로부터의 자유 및 새 언약의 시작과의 연결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출애굽을 통해 가능하게 된 모세 언약의 시작을 기념하는 절기를 상기시킨다.11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Klawans, J., Purity, Sacrifice, and the Temple: Symbolism and Supersessionism in the Study of Ancient Juda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68–72Maccoby, H., Ritual and Morality: The Ritual Purity System and Its Place in Juda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esp. 1, 11, 27, 47, 170.12 특히 예레미야서 31장에 있는 새 언약 약속에 대한 관점에서 이 논리에 대한 유사한 설명을 보려면 Whitlark, J.A., 'Fidelity and New Covenant Enablement in Himes'Getting “Saved”: The Whole Story of Salvation in the New Testament (eds Talbert, C.H. 및 Whitlark, J.A.Grand Rapids: Eerdmans, 2011) 72–91, 특히. 81-91.13 서신의 종말론적 틀에 대한 철저한 논의를 보려면 Penner, T.C., The Epistle of James and Eschatology: Re-reading an Ancient Christian Letter (JSNTSup 121Sheffield: WBC247 Sheffield Academic, 1996)을 참조.14 이 서신이 회칙이라고 주장하는 Richard Bauckham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야고보가 디아스포라의 여러 지역에 있는 그의 독자들이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구체적이지 않고 전형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암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실패를 질책합니다'(Bauckham, R.J., James: Wisdom of James, Disciple of Jesus the Sage (London: Routledge, 1999) 26).15 여기서 순결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더 깊은 희생적 논리가 있을 수 있다(예: Bauckham, James, 146–7, 165). 야고보의 정결을 주제로 Darian Lockett의 최근 연구를 참조. Lockett은 야고보서의정결 범주의 주요 용도 중 하나가 독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경계를 식별하고 구분하는 것을 돕고 독자의 정체성을 주변 문화와 분리/구별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한다(Lockett, D.R., Purity 및 Worldview in the Epistle of James( LNTS 366런던: T&T Clark, 2008)). 이것은 또한 베드로전서의 측면과도 잘 일치한다(아래 참조).16 보컴은 야고보서의 '자유의 법'(1:252:12) 언어가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나다'(1:18)와 '심겨진 말씀'(1:21)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음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제어하고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은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나오는 것이다(James, 146). 다른 설명과 해석적 견해에 대한 철저한 요약을 보려면 Allison, James, 311–16을 참조.17 특히 참조. Marcus, J., ‘The Evil Inclination in the Epistle of James,’ CBQ 44 (1982) 606–21Allison, James, 246–8Neusner, J., ‘Sin, Repentance, Atonement and Resurrection: The Perspective of Rabbinic Theology on the Views of James 1–2 and Paul in Romans 3–4,’ The Missions of James, Peter, and Paul: Tensions in Early Christianity (eds Chilton, B. and Evans, C.NovTSupp 115Leiden: Brill, 2005) 409–34, here 431).18 이 견해에 대한 자세한 변증은 Hartin, P.J., A Spirituality of Perfection: Faith in Action in the Letter of James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99)를 참조.19 특히 참조. Bauckham, James, 29–108.20 참조 Achtemeier, P.J., 1 Peter: A Commentary on First Peter (HermeneiaMinneapolis: Fortress, 1996) 50–1, 69– 72.21 따라서 Michaels, J.R., 1 Peter (WBC 49Waco, TX: Word Books, 1988) 247.22 여기 Williams, M., The Doctrine of Salvation in the First Letter of Peter(SNTSM 149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85–97에서 유월절/출애굽 주제의 영향에 대한 최근의 철저한 논의를 참조 (참조. Caird, G.B., The Language and Imagery of the Bible (London: Duckworth, 1980) 156). 대조되는 의견은 Achtemeier, 1 Peter, 128–9를 참조.23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chtemeier, 1 Peter, 88–9Michaelis, 1 Peter, 12–13.24 베드로전서는 이 용어를 사용한 신약의 단 두 권의 책 중 하나이다(베드로전서 4:16참조, 행 11:2626:38).25 선택지에 대한 간결한 논의와 이 견해를 뒷받침하려면 Bauckham, R.J., Jude, 2 Peter (WBC 50Waco, TX: Word Books, 1983)141–3을 참조.26 그래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Bauckham, Jude, 2 Peter, 40, 241cf. Hafemann, S., ‘Salvation in Jude 5 and the Argument of 2 Peter 1:3–11’ The Catholic Epistles and Apostolic Tradition: A New Perspective on James to Jude (eds Niebuhr, K.–L. and Wall, R.L.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09) 331–42, 여기서는 339.27 따라서 예를 들어 Bauckham, Jude, 2 Peter, esp. 154–6, 294–5Dejardins, M., ‘The Portrayal of the Dissidents in 2 Peter and Jude: Does it Tell us More About the “Godly” than the “Ungodly”?’ JSNT 30 (1987) 89–102, here 98–9.​​Hebrews and the General EpistlesDavid M. MoffittT&T Clark Companion to the Doctrine of Sin[Moffitt (PhD, Duke University) is reader in New Testamen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St. Andrews in St. Andrews, Scotland. His book Atonement and the Logic of Resurrecti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received a Manfred Lautenschläger Award for Theological Promise in 2013.] Hebrews and the General Epistles (we here refer to James, 1 and 2 Peter, and Jude)1 share some common themes and assumptions as they address the problem of sin. All five texts are heavy on exhortation. Their authors direct their epistles to insiders—those who already belong to the community of believers in Jesus.2 As such, much of the exhortation of these letters focuses on the need to remain firm in one’s commitment to this belief and to the community of the faithful. One of the central characterizations of sin in these texts is, therefore, turning away from Jesus and the believing community, and/or returning to a past state and past behaviors.Each of these epistles also seeks to reinforce a reorientation of disordered desires. Sin arises when one’s primary orientation or inclination is towards the present, visible world. This entails accepting the logic and values of the evil age. Humanity in general is inclined to desire the corruptible things of this world. These texts argue that a proper orientation for life looksinstead towards unending life in unhindered fellowship with God in the future age. Thus entering into the coming, eternal realm is the goal of such an orientation. This desire for God and for obtaining the promises he has made stands at the heart of faith. Life that is rightly ordered in the here and now—a faithful life—is life lived in line with the eschatological hope of this future inheritance made possible by Jesus’ salvific work. The crucifixion,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Jesus are, however, more than just the means for salvation. They also reveal a divine/heavenly logic wherein death does not determine or delimit what is real and meaningful. The blessing and glory of restored fellowship with God stands on the other side of suffering. Thus death cannot ultimately prevent God from making good on his promises. Faithfulness to God, even when this results in suffering and death, will find its reward in the future. To continue living in sin or to return to the sin(s) one had previously abandoned upon believing in Christ is to question the character and power of God. Those who live like this risk forfeiture of the inheritance God has promised for his children. The ethical logic of these texts therefore attests, to one degree or another, the influence of apocalyptic sensibilities on their understanding of Christian identity.In general, these texts also agree on the importance of stability and maturity. As just noted, sin is linked with a lack of confidence in God and in one’s own convictions about him. Convictions that shift frequently—beliefs and practices easily adopted or abandoned, are signs of immaturity that correlate closely with an inclination that produces sin. Suffering is viewed in these documents as a proving ground whereon one’s mettle is tested. To endure suffering is to grow in maturity, to become more stable and less susceptible to disordered desires. To turn from God in the midst of suffering is to sin because this again elevates the present over the future.In the discussion that follows we explore each of these epistles noting the ways they characterize sin. It should be noted at the outset that these texts are not systematically reflecting on sin so much as responding to and warning about sin. Hebrews and James seem to say more about the underlying factors that produce sin. On the whole, however, our study must often rely more on implications deduced from the positive exhortations found in these documents than on their explicit accounts of the logic of sin. We begin with Hebrews, which in many and various ways stands apart from the other letters examined here.​HebrewsHebrews is an ancient sermon whose original preacher wrote out the text and sent it as an epistle (cf. 13:22–25).3 Unlike the General Epistles (excepting perhaps Jude), the epistolary conclusion of Hebrews and certain details throughout the text (e.g. 10:33–3412:4) indicate that the writer and the audience were personally acquainted. This suggests that Hebrews was, like Paul’s letters, originally written to a particular congregation facing particular struggles. When, therefore, the author speaks about sin, something he does frequently throughout the homily,4 he almost certainly intends to redress a specific problems in the congregation of which he and they are aware. The writer’s shared knowledge with the text’s original recipients likely explains why he says so little about the precise nature of the problems he seeks to correct.Because the author relays little specific information about himself or his audience, little can be discerned with certainty about his identity, the make up and locale of the original audience, or the precise date of the composition.5 Interpreters are left to puzzle out the most plausible background for the sermon from the limited evidence that lies within the text.Nevertheless, the general contours of the author’s concept of sin emerge clearly in his brief ‘word of exhortation’ (cf. 13:22), even if the specific circumstances and problems facing the first readers are now hard to explain.The writer begins his homily by emphasizing the ongoing reality of God’s speech. God spoke in the past by way of prophets, but now he speaks to his people by way of his Son (1:1–2). The author continues this emphasis on God’s speech throughout the sermon by identifying God as the speaker of a variety of statements in scripture (see, e.g., 1:5–133:7–185:5–68:8–1310:3013:5). At times God’s voice in scripture directly exhorts the audience (esp. 3:7–1512:5– 6). The congregation is even now being warned by God from heaven, presumably, as he says in 1:2, through the voice of the Son (12:25cf. 3:1).The author, in keeping with his insider focus, stresses that the congregation had responded appropriately to God’s voice in the WBC247 past. Specifically, they had previously accepted the message they heard about Jesus from his earliest disciples (2:1–4). They had even been subject to and endured past persecution as a result of their commitment to Jesus (10:32–34cf. 6:10). Because they previously believed the report about Jesus, the author identifies the central root of their current problem as apistia—unbelief or, more literally, lack of faith/faithlessness (a- faith). Among the primary manifestations of such faithlessness are: 1) failing to maintain one’s commitment to the shared confession6 (e.g., 4:1410:23cf. 2:13:14)2) departing from the community of the faithful (esp. 10:25cf. 6:4–6)and, 3) spurning Jesus, the blood of the covenant he mediates, and the Spirit (10:29). The common thread running through thesedescriptions is that of actions that disobey God’s call to come into his presence and orient one instead away from God and his people. Thus, sin in Hebrews is primarily conceptualized as the refusal to obey God’s voice that follows from lack of faith in God’s ability to make good on his promises.The author appeals to the failure of Israel in the wilderness, particularly as this is mediated through Ps 95, as especially illustrative of sin. When God commanded the people to enter their inheritance, associated in Hebrews with God’s protological rest (4:4–7), they listened instead to other voices and refused to obey God’s voice (cf. Num 13:27–14:10). In a way analogous to that episode, Hebrews locates the congregation in the wilderness poised to enter the ultimate, promised inheritance.7 In the past the people in the wilderness sinned because, although they heard the word of God (3:164:2), they did not have faith/they were apistia (3:19). Rather than moving towards God and the promised inheritance being offered to them (3:124:11), Israel at that time disobeyed. Because of this they were not allowed to enter the land. The negative example of Israel implies that the audience must not turn back from the divine summons that they now here in Christ. If they do, they too might lose the opportunity to enter the promised rest (cf. 6:4–6). Such a refusal to obey God’s call is directly contrary to God’s will not only because it rejects the blessing God wants to give his children, but also because it calls into question God’s ability to do what he has promised to do.While this lack of faith primarily expresses itself in sins that orient one away from God and the promises he offers his children, one might wonder: what motivates such faithlessness and sin? As is shown below, James identifies passion or desire that inclines toward evil as the root cause of sin (James 1:14–15cf. 1 Pet 2:112 Pet 1:4Jude 16). Hebrews, however, nowhere explicitly answers this question. The author does, though, assume that something is fundamentally wrong with the present human condition. Apart from Christ, humans are both enslaved to the fear of death and subject to a guilty and impure conscience. These two interrelated forces appear to be the main drivers of apistia and so also of sin. As such, humanity is in need of salvation by having these two problems solved. Humans, that is, need both to be freed from their slavery and to be purified if they are to obey God’s voice and do his will by moving towards him rather than away from him.On the one hand, then, salvation is necessitated by humanity’s peculiar subjection to the power of death and the one who wields this power—the devil (2:14). Because of this situation, humanity lives in a state of perpetual enslavement to the fear of death (2:15). The author never plainly affirms Paul’s claim that death came into the world through Adam’s sin (Rom 5:12–19), nor does he explicitly refer to Adam anywhere in the homily. Yet his argument that the heavenly Son of God is the particular human being, Jesus, who, in accordance with Ps 8, has now been elevated above everything else in creation, including the angels, suggests that he has Adamic traditions in mind (see Heb 2:5–18).8 The idea of Adam’s fall is also likely to be assumed by the author as the explanation for why humanity finds itself subjected to the devil and enslaved to the fear of the power of death.​In keeping with Paul and other New Testament voices, the author believes that Jesus’ death solves this problem by defeating the devil and freeing those enslaved by fear of the power of death (2:9, 14–159:15). It should be noted that the significance of Jesus’ resurrection in Hebrews has often gone unnoticed in modern scholarship.9 Yet both 1) the logic of Jesus’ elevation as a human being above the angels in the heavenly realmsand, 2) the emphasis that Hebrews places on Jesus’ high-priestly ministry of offering and interceding for his siblings in the heavenly tabernacle (7:23–268:1–69:24–26cf. 2:17–18) suggest that Jesus’ resurrection from the dead is essential to the author’s claim that Jesus defeated death and the devil. Nevertheless, Heb 2:9 and 2:14–15 especially identify Jesus’ death as a key element within the larger narrative of the Christ event for how he accomplished the redemption of God’s people from slavery.10​On the other hand, the author also believes that humanity suffers from the interrelated problems of guilt and impurity, especially at the level of the conscience. The Levitical sacrificial system provided means for dealing with problems of sin, guilt, and impurity. Specifically, the manipulation and presentation of blood, which is life (e.g., Lev 17:11, 14cf. Gen 9:4Deut 12:23), was essential for obtaining purification and forgiveness for the offerer (e.g., Lev 4:20, 2612:814:19–2016:15–16). Because God punishes sin and refuses to dwell in earthly spaces tainted by impurity or allow impurity to come into his presence, purity and forgiveness were necessary to maintain the covenant relationship. Obtaining forgiveness and purification, which was among the central goals of sacrifice, helped ensure that God’s presence would remain among his people and that God’s people could dwell close to his presence.11 Hebrews works with this sacrificial logic to develop an analogy between Jesus’ sacrifice and the Yom Kippur sacrifices prescribed in Leviticus. Thus, when reflecting on Jesus’ atoning sacrifice, the author emphasizes one of the most central atoning elements of the sin offerings of Yom Kippur—the high priest’s conveyance of the blood/life of the sacrifice into God’s presence in the holy of holies (cf. Lev 16:15–16). Jesus, as humanity’s great high priest, passed through the heavens (4:14) in order to offer his sacrifice to God in the heavenly sanctuary (8:1–69:11–14, 24–26).The author believes that the priestly acts of drawing near to God and offering blood effected limited purification for God’s people (9:10, 13, 22). By way of analogy to the Levitical prescriptions, the author explain how Jesus’ act of passing through the heavens and appearing before his Father in the heavenly holy of holies brought ultimate forgiveness and purification (i.e., sacrificial atonement) to those for whom he ministers (9:1412–13cf. 1:3). Moreover, Jesus’ purification extends even to the conscience, something the author thinks the Levitical sacrifices were unable to do. Jesus’ performance of the heavenly, high-priestly Yom Kippur sacrifice therefore maintains the covenant he mediates. Thus, as was the case in a limited way under the Mosaic covenant, God and his people can now dwell together. The forgiveness and purification Jesus has obtained for his people ensures that they can approach God and dwell in his presence in their eternal inheritance.12The proceeding discussion suggests that the twin problems of enslavement to the fear of death and impurity both exert negative pressure that influences people to disobey God’s voice.​Instead of approaching God and moving towards the promised inheritance he offers, death and impurity motivate people to turn away and thereby sin. In other words, apistia and its manifestation as sinful actions flourish when these problems are unresolved and/or allowed to determine the way one lives. The author of Hebrews therefore appeals to the confession of Jesus’ death, resurrection, and high-priestly entrance into God’s presence to assure the congregation that both of these problems have been solved. Because of Jesus, full atonement is now a reality.​Thus, instead of living in a way determined by an orientation that pushes one to refuse God and turn from him, Hebrews exh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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