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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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에 콜걸 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우리나라가 유토피아는 아니기에 온갖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꽃은 햇볕이 밝고 공기가 청량한 곳에 피지만 뿌리는 축축하고 어두운 곳을 더듬는다. 사람 사는 곳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화려한 곳도 있지만 음습하고 더러운 일들이 끊기질 않는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버닝썬을 제목으로 한 다큐는 영국 언론사인 BBC에서 제작되었다. 이태원 대량 압사 사고에 대한 다큐도 그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시청하기까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정확하게는 용기가 축적될 시간이 필요했다.
버닝썬과 김학의 사건의 마무리를 보면서 사회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정의 구현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타인의 커다란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좀 버거웠다. 어쩌면 정의를 명분 삼아 분노를 터트릴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철부지로 자라고 육체의 성인이 되어 거대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다가 생산성보다 유지비용이 더 드는 시기가 오는 것이 단순화한 현대인의 타임라인이다.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인 정신 부분은 육체의 성장 쇠락과 정확한 일치 곡선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적 본능과 생존 욕구로 사회성을 함양하던 시기를 지나면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고자 하는 시기가 온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들을 겪으면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시야가 트인다.
정치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각자의 우선순위가 다르다. 본인이 정치인이 아닌 이상 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콜걸 얻고 싶은 결과를 보기는 힘들다.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지지자들이 우선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기가 힘들다. 대다수의 정치인들의 목표가 권력으로 이루고픈 무언가가 아니라 권력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윗 세대들이 하던 그놈이 그놈이다. 혹은 야당이나 여당이나 똑같은 놈들이다. 하는 말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사실은 여전히 고려짝 호족 집단의 연합체와 같은 것이다. 호족 집단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배하고 표면에 나선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진 명예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호족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그나마 다른 나라보다 사정이 나은 건 국민들에게 각인된 건국 신화 덕분이다. 청동기 시대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모토로 세운 국가의 이름은 조선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조선이 망해 영토는 부여로 이어진다. 그 유민들이 삼한을 세웠다. 부여는 고려가 멸망시켰다. 고구려에서 갈라진 백제가 부흥을 꿈꾸며 남부여라는 이름을 이었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한반도 중남부를 통일하고 고려의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다. 백제의 계보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이 한반도를 끝없이 갈구하는 것은 태생적인 숙명이다. 발해와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세워지고 다시 조선의 이름으로 바뀌는 동안 어느 부분에서 건국신화에 대한 첨삭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국호인 대한은 옛 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삼한을 이은 이름이다.
어디까지가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는 물론 각자의 정의가 다르다. 그러나 신의 자손인 권력자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콜걸 많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권력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유전자에는 신화로 세겨져 있다. 그리고 특권층의 비리와 범죄에 냉소보다는 분노가 사회적으로 건강한 결과를 가져온다.
평범한 서민이 아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언론사들은 대부분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아니면 언론사 그 자체가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언론이라는 권위로 국민들에게 보여줄 것과 가릴 것을 결정할 수 있다.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순식간에 불이 붙은 버닝썬이나 김학의 별장 접대 같은 것들 말이다. 언론사의 사주들이 외부의 적에 대해 연합을 이루고 있지만 연합내부에서는 각자 경쟁이다. 그리고 가끔씩은 특권층의 비리와 범죄에 분노하는 시늉을 해야 소비자인 국민들에게 같은 편이라는 신뢰감을 유지할 수도 있다.
어쩌다 언론에 터지는 고위층 비리는 자신들끼리의 경쟁에서 패배자를 솎아내는 과정이거나 너무 급하게 번져 도저히 덮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영국 언론사인 BBC에서 버닝썬 다큐가 제작된 연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주는 압력에 좀 자유로울 수 있고 BBC라는 이름이 주는 기댓값에 플러스가 된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정의를 위해서라던가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선의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이미 순수함을 잃었다.
아직 누군가는 도덕과 정의로움이 삶의 목표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는 있다. 그러나 도덕과 정의를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콜걸 삼는다. 그럼에도 위선이 관성이 되면 선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위선자들에게 마음이 기운다.
영상은 케이팝 남자 가수들이 마약성 약물을 이용해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불법 영상을 찍었던 사건만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자신도 불법 영상으로 협박을 받았고 끝내 죽음을 택한 가수 구하라 씨 이야기가 가미되었다.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의 간명한 구도로 만들어져 있다. 사실이다. 영상의 사실성과 비장미를 강조하기 위해 취재기자가 영상에 실명과 얼굴을 드러낸다.. 그조차 쉽지는 않은 일이다.
영상을 보고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는 기자를 비롯한 영상제작진들에 대한 고마움이다. 둘째는 영상에서 감히 다루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물론 기자들도 한국에서 살려면 타협했어야 할 부분이었다는 이해는 있다.
버닝썬은 빅뱅의 멤버 승리가 운영하던 클럽의 이름이다. 귀빈들은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하룻밤에 11억 도 지불했다. 방음이 철저한 그 방에서 하룻밤 1억을 유흥으로 쓸 수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모였다.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는 그중에서 좀 끗발이 약했던 것 같다. 마약사범으로 언론을 타고 빵에도 잠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귀한 집 자제분들이나 거기에 불려 가던 초등학생 콜걸이나 뒤를 봐주던 강남 경찰서 이야기는 버닝썬이 최초 불탈 때도 잠시 언급되다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가 철저한 수사와 관련자 엄벌을 이야기했음에도 연예인 몇몇을 사법처리한 것이 고작이다.
아예 벌을 받지 않은 김학의 별장 성 접대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콜걸 아마 입 조심을 시켜야 했던 승리는 군 입대를 했다. 언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1년 6개월의 형량을 정했다. 그즈음에 보수당 유력정치인의 딸이 마약 3KG을 밀수하다 세관에서 잡혔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녀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마약이 상류층과 그 자제들에게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듯했다. 경제학의 일각에서 주장하는 낙수효과는 기득권의 선량함과 자비를 전제로 한다. 상류층의 문화는 하층민의 선망을 바탕으로 얼핏 낙수효과처럼 퍼져나간다. 한동안은 마약 관련 뉴스가 언론에서 다뤄졌다. 직장인이 유흥업소 여종업원에게 몰래 마약을 먹여 일어난 사망 사고라던지 마약에 취해 일어난 교통사고 같은 것들 말이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런 뉴스들이 사라졌다. 여전히 종종 엄청난 양의 마약이 세관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은 뉴스로 나오지만 구체적이고 피부로 위협이 느껴지는 실제 사례들은 다뤄지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이 공조 현상을 일으키면 사회가 전복되는 것도 순식간이니 이해는 한다.
이제부터는 소설이다. 버닝썬에 엮여있던 귀한 집 자제분들이 뉴스에 나오지 않고 사법 처리도 되지 않았던 것과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추론이다. 주류언론들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증오한다. 이 세 분의 대통령의 정책 중 수혜자가 서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를 제로섬게임이라 생각하면 내 몫을 빼앗아 거지들에게 나눠주는 경우를 당한 옛날 호족들의 분노와도 상통한다.
군부 독재를 벗어난 현대의 호족들은 종종 5년 임기의 대통령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정치는 엔터산업과 비슷한 콜걸 점이 있다. 언론 노출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스토리텔링으로 호감도를 키울 수 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안철수 새 정치 열풍을 기억한다.
귀한 집 자제들을 난감한 사건에서 빼주는 것을 시장 상인들의 장사처럼 흥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유대관계의 시작으로 혹은 선대부터 이어졌던 특별한 인연을 더욱 돈독히 하는 쪽으로 이야기되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주고받음으로 신뢰는 단단해지고 앞으로 발생할 이익의 공유가 약속되면 끈끈한 의리가 형성된다.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버닝썬 사건 당시 중앙지검장이던 윤석렬의 선거 참모로 붙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어색한 초보 정치인에게 멘토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새 정치를 주장하던 안철수도 국민의 힘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의와 도덕을 명분으로 삼지만 그리 살지는 않는다. 이해한다. 그 역시 나약한 부분이 있는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거지 칭찬한다는 말은 아니다.
전국의 하수처리장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된다. 최근의 뉴스를 보면 필로폰만 하루 투약자가 5만 명이 넘는다. 버닝썬의 최초신고자는 성추행으로 고소당해 실형 선고를 받았다. 내 생각엔 그나마 괜찮던 그래도 지지자들의 영향을 받던 정치인들이 미투 열풍에 많이 꺾였다. 결국 대선주자로 윤석열과 이재명을 남겨두었었다. 김학의 사건과 버닝썬 사건의 종결은 마약 판매 조직에게도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마약 관련 사고들이 뉴스에 거론되었다. 한참 전에 마약 1회 투약분의 가격이 1010만 원이라고 들었다. 극빈층이 아닌 이상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다.
일용직을 다니던 조선족에게 들었다. 콜걸 경험담 같았다. 그는 비아그라와 필로폰의 효과를 비교 설명했다. 비아그라는 먹는다고 바로 서는 것도 아니라 게임에 참가하는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 힘겹게 세워도 한번 싸면 그걸로 끝이다. 필로폰은 약발이 들면 바로 선다. 싼다고 끝이 아니고 몇 번이고 가능하고 단단하다. 대신 그렇게 하고 나면 온몸의 진액을 짜내는 느낌이라 후유증이 며칠 간다.
인간에게 성은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이룩한 문화적 성과의 대부분이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가림막을 치고 음성변조를 하고 방송에 나왔던 남자의 말을 기억한다. 이른바 고개 숙인 남자였다. 어느 날 갑작스레 안 되는 순간부터 삶의 일부분이던 성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수 십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인간에게 결핍은 그런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던 한동훈이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가 인식하기에도 마약이 지나치게 많아졌는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피자 한 판 값으로 마약을 살 수 있다. 판매자들이 공급물량이 많아져 신규고객확보를 위해 가격을 내렸나 보다.
한동훈이 공무원이던 시절 압수수색영장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조언대로 휴대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담당 검사와 몸싸움을 벌였다. 입장이 바뀌어 이제 자신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겠다고 말한다. 잘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아랫사람들이야 하는 시늉은 하겠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우러나서 하는 일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외부인이 보기에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콜걸 결국 문제가 생긴다는 걸 전문가들이나 당사자들은 안다.
언제나처럼 우연의 일치 거나 개인의 일탈이었겠지만 마약 수사로 영화배우 이선균 씨가 죽음을 택하도록 내몰렸다. 피자보다 싼 마약과의 전쟁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정치인 한동훈은 여당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꼴을 보아하니 다음 대선에도 출마할 것 같다.
권력의 중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디 즈음에 존재하는 것처럼 도덕과 정의의 기준도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형성된다. 중세 유럽의 정의와 조선의 도덕이 일치하지 않고 현대에도 중국의 도덕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정의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도덕과 정의도 변화한다.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가 힘이 도덕을 다스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결국 정의의 포지션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된다. 문명의 발전과정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정확하게 일직선을 그리지는 않지만 우리라는 카테고리를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배타적이고 혐오를 자양분으로 하는 극단적인 움직임은 자본주의의 극단인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세계화의 반동이다.
배타적인 움직임이 동력을 상실할 때면 반동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더 포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국가와 사회가 선도국의 위치에 설 것이라고 본다. 구성원들을 더 많이 포용하고 열린사회가 언제나 경쟁에서 승리한다.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배타적인 권리보다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 여전히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법치는 요원해 보이지만 내가 생각한 소설의 결말이 좀 더 해피엔딩에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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