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유튜브라이브 방송

유튜브 라이브 포트폴리오

CTN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천하는 이번주 가볼만한 전국축제 -9월 30일~10월 6일까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Happy
댓글 0건 조회 46회 작성일 24-10-03 21:28

본문

​00:00:04 부산고구려$ 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하는 고고학 전문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에 왔습니다.00:00:12 가야맞이방입니다. 원래 바다였지만, 낙동강의 퇴적활동으로 생긴 김해평야에 있는 부산의 관문 '김해공항'에서 시작된 영상이 금관가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선사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영상을 보여주네요. 우리가 그런 박물관이다 뭐 그런 영상이겠죠? 00:00:55 역사순으로 전시하는 '가야로 가는 길'전시실입니다. 00:01:03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보여주는 전시.00:01:12 창녕비봉리에서 출토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와 노. 배는 재현품이고 노는 진품입니다. 00:01:18 신석기시대에는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며 물고기나 동물을 잡고, 식물채집으로 먹거리를 얻었습니다.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였고 초보적인 농사도 지었습니다. 00:01:31 부족한 자원을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기도 했습니다.00:01:53 동남해안 일대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과 일본 조몬 토기는 일본 규슈 지역과 교류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 팔찌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대표 교역품 중 하나였습니다.00:02:07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사냥과 채집 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찌르기, 자르기, 파거나 긁어내기, 빻기 등 다양한 용도에 맞는 뗀석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했지만, 용도에 따라 특정한 돌을 골라 만들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석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고 정교해졌습니다. 00:02:31 창녕 비봉리의 패총 단면을 전사한 것입니다. 00:02:39 약 1만 년 전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의 자연환경이 지금과 비슷하게 변해갔습니다. 활과 화살을 이용해 사슴, 멧돼지 같은 따뜻한 날씨에 사는 빠른 동물들을 사냥했습니다. 강가나 바닷가에서는 뼈나 돌로 만든 낚싯바늘과 작살, 그물을 이용해 다양한 먹거리를 확보했습니다. 망태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사냥과 채집으로 얻은 먹거리를 넣어 두었을 것입니다. 돌로 만든 보습, 괭이를 이용해 땅을 일구며 농경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00:03:15 토기의 등장.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진흙을 구우면 단단하게 변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토기의 발명으로 어렵게 확보한 먹거리의 보관, 운반이 손쉬워졌고 조리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략 1만 년 전에 출현한 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생김새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00:03:37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방식이 일반적이지만 동굴에 놓아두거나 뼈만 추려 모아 둔 경우도 있습니다. 조가비나 짐승 뼈 등으로 만든 팔찌나 발찌로 죽은 이를 치장하고 토기를 옆에 두기도 했습니다. 부산 가덕도에서는 신석기시대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는데 확인된 인골만 48개체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입니다. 죽은 이의 몸을 곧게 펴 묻었던 다른 지역의 무덤과는 달리, 죽은 이를 엄마 뱃속 아기 모습처럼 웅크린 자세로 묻는 굽혀 묻기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00:04:15 연표. 구석기시대부터 가야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기준으로 설명합니다.00:04:43 00:04:51 청동기시대 간돌칼00:04:56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를 지나서00:05:01 농경과 마을의 탄생.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조·기장 위주의 소규모 잡곡 농사와는 달리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채의 움집, 논과 밭, 마을 전체를 두른 도랑이나 울타리가 청동기시대 마을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정착하면서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도구들도 발달했습니다.00:05:30 청동기시대 살림살이(돌로 만든 도구).농사가 청동기시대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사냥과 물고기잡이는 여전히 중요한 먹거리 확보 방법이었습니다. 돌화살촉과 돌창, 그물추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각종 생활 도구를 만드는 데 나무는 이때에도 핵심 재료였습니다. 나무를 정교하게 가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가 발달했습니다. 조갯날 도끼·자귀·대팻날·끌 등이 대표적인 목공구입니다. 옥돌을 다듬어 영롱한 빛깔을 내는 목걸이를 만드는 데도 돌로 만든 공구를 부산고구려$ 사용했습니다. 00:06:17 청동기시대 살림살이(무문토기).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은 민무늬토기입니다. 민무늬라 하지만 아가리 겉면에 짧은 선이나 구멍 등 간단한 무늬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바리·대접·접시·항아리·독 등 필요한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하지만 바닥은 대체로 납작합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며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00:06:45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특별히 많은 공을 들여 만든 특별한 토기입니다. 붉은 안료를 개어 발라 문질러 윤을 내거나 독특한 방식으로 검은 가지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질 좋은 바탕흙을 사용한 데다 정성스레 만든 덕에 다른 살림살이들처럼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한 그릇으로 대접받았고 무덤의 껴묻거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00:07:14 농경사회의 기념물, 고인돌.농경사회에서는 물 대기, 씨 뿌리기, 수확하기 등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 노동이 중요해졌습니다. 농경의 발달은 공동체 안팎으로 여러 갈등을 발생시켰고 이를 조정하는 인물의 역할과 권위도 점차 높아졌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고인돌에 넣어 둔 돌칼과 돌화살촉은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부 과장된 크기와 형태의 돌칼과 돌화살촉은 실용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점에서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알려줍니다.00:07:52 가야의 여명.청동기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나타난 덧띠토기문화와 더불어 새롭게 확산된 철기문화는 사회변동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는 이전부터 뿌리내린 지역문화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 채 일정 기간 공존하면서 서서히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바뀌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널무덤에서 널리 확인되는 철 제품과 와질토기가 대표적입니다.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 종류와 양이 많아진 것도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찾아볼 수 없던 큰 변화입니다. 주변 지역과 교류도 활발해져 각 지역 공동체들은 새로운 선진문물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00:08:07 가야의 여명.​청동기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나타난 덧띠토기문화와 더불어 새롭게 확산된 철기문화는 사회변동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는 이전부터 뿌리내린 지역문화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 채 일정 기간 공존하면서 서서히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바뀌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널무덤에서 널리 확인되는 철 제품과 와질토기가 대표적입니다.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 종류와 양이 많아진 것도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찾아볼 수 없던 큰 변화입니다. 주변 지역과 교류도 활발해져 각 지역 공동체들은 새로운 선진문물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00:08:35 철기의 사용.철은 고대사회 형성과 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석에서 뽑아낸 철로 생활 도구나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이 필요했고 이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 한층 성숙한 사회·정치 체계를 갖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옛 가야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철기가 나타납니다. 간단한 공구와 농구를 시작으로 점차 무기나 말재갈 등 여러 종류의 철기를 만들었습니다.00:09:04 덧띠토기문화의 등장.덧띠토기는 민무늬토기의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만든 것입니다. 아가 리에 덧붙인 점토띠의 자른 면은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합니다. 아울러 검은간토기, 굽다리접시,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만든 공구와 무기 등 새로운 물건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무덤은 고인돌을 대신하여 개인의 권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널무덤 위주로 변합니다. 삼각형 점토띠로 변할 즈음에는 새로운 철기문화도 유입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기나긴 선사시대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00:09:43 와질토기. 제작 기술의 혁신.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는 지역별로 독특한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등장합니다. 질감이 기와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회색, 회흑색을 띠며,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기에 제사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릇의 모양은 주머니단지,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그리고 짧은목 항아리 등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굽다리를 붙이거나 화로모양 그릇받침이 나타나는 등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집니다. 00:10:19 옻칠, 부산고구려$ 빛깔 입은 목기.옻칠은 목기의 장식성과 기능성을 한껏 높이는 기술입니다. 옻칠한 나무는 윤이 나고 표면이 매끈해질뿐더러 습기, 열, 부패에 강합니다. 목제품뿐만 아니라 토기, 가죽, 쇠붙이 등에도 칠을 발라 그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옻나무 수액을 채취하고 정제해서 칠하기까지 과정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당시 칠기는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널무덤에서 발견된 칠기는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경제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00:11:07 해상 교역망의 거점.옛 김해만 일대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동남해안 지역에서는 당시 국제교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 세발솥, 청동 거울, 동전 등은 중국과의 교류를, 그리고 야요이 토기, 청동 투겁창 등은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 줍니다. 가야 지역의 대표 취급 품목은 철이었는데, 중국 역사책에 특별히 기록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국제교류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가야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00:11:41 유력자의 무덤, 창원 다호리 1호 나무널.기원전후, 청동기시대부터 농경을 주요 생업수단으로 삼아 성장, 발전하던 촌락들은 이즈음 큰 변화를 겪습니다. 크고 작은 촌락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으뜸가는 촌락의 영향력이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촌락들을 아우르러 읍락이라 합니다. 변한의 여러 나라들은 읍락 몇 개가 모인 형태를 띠고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껴묻거리의 질과 양이 최상급인 점에서 이 일대에서 으뜸가는 읍락의 유력자로 추정됩니다.00:12:21 검, 거울, 옥.검, 거울, 목걸이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지도자 혹은 지배자를 상징하는 물품이었습니다. 널무덤 단계에 이르면 철로 만든 검이 나타나고 칼집과 손잡이 장식이 정교해지며, 중국 거울을 본떠 만든 거울도 등장했습니다. 주로 옥으로 만들던 목걸이는 유리, 마노, 수정 등이 더해지며 더욱 화려해졌습니다. 변한 사회의 유력자들은 특정한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 혹은 권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00:12:55 가야 웹툰 공모전을 했나봐요. 수상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로 검색해보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다 올려져 있네요. 멋집니다.00:13:23 가야의 발전00:13:25 가야의 발전​변한의 여러 작은 나라에서 출발한 가야는 발달한 철기 생산 능력과 남해안 바닷길 중개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차츰 축적된 국력과 나라 안팎으로 높아진 위상은 마침내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3세기 후반 무렵 지배계층 무덤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모습에서 그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을 만들고 많은 재물을 장례에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순장 풍습도 나타났습니다. 4세기는 금관가야의 눈부신 성장이 주목됩니다. 5세기 이후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소가야가 함께 발전했습니다.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남은 커다란 무덤과 다양한 출토 유물은 당시 지배자들의 우월한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00:14:10 단단한 토기의 등장, 그리고 성대한 장례.3세기 후반, 가야 지역에서는 새롭게 도입된 기술로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밀폐된 굴가마에서 1000도가 넘는 온도로 구운 토기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습니다. 어깨에 꼭지 두 개가 달린 짧은목 항아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단단해졌습니다. 더불어 제사 음식을 넉넉하게 담았을 토기 수십 개를 지배자의 무덤에 껴묻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성대한 장례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지만 이즈음의 극적인 변화는 부와 권력이 지배계층에 한층 더 집중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00:14:51 말갖춤과 여러 철제품.말을 기르고 말갖춤을 만드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과 말갖춤은 고대사회에서 신분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발걸이와 안장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꾸미개로 완성된 실용적 말갖춤이 4세기 대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에서 발견됩니다. 다양한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이자 화폐 역할을 한 부산고구려$ 덩이쇠와 함께 고리자루 큰칼, 투겁창, 화살촉 같은 무기들도 대량으로 장례에 사용되었습니다. 00:15:25 외래물품.동아시아 해상 교역망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낙동강 하구와 연안 일대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외래 문물이 발견되어 당시 발전한 가야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김해만 일대 가야 유적에서 발견 사례가 두드러지는데 금관가야 지배층의 공동묘지였던 김해 대성동유적이 단연 돋보입니다. 중국 진나라의 청동 솥과 허리띠, 북방 선비족 계통의 말갖춤, 일본계 청동 제품과 비취 경옥, 열대 조개 등 다양한 물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물건들은 필요에 따라 가야에서 현지화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00:16:06 뚜껑 있는 긴목 항아리 · 바리모양 그릇 받침 / 김해 대성동, 5세기, 높이 38.8cm(그릇 받침)00:16:12 용 · 봉황장식 고리자루 큰칼, 고리자루 큰칼고리자루 큰칼 함안 마갑총, 길이 89.7cm / 용·봉황장식 고리자루 큰칼 합천 옥전, 길이 83cm00:16:21 미늘쇠, 함안 도항리, 5세기, 높이 60cm00:16:28 아라가야와 대가야의 발전.아라가야의 성장은 함안 말이산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잘 드러납니다. 불꽃무늬구멍 굽다리접시가 특징이며 말갑옷·고리자루 큰칼·미늘쇠 등 많은 철제품이 확인됩니다. 5세기 동안 큰 전성기를 누렸으며, 6세기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여 가야 세력의 결속을 도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후반 가야 최대 세력으로 부상해 중국 남제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대가야는 가야 세력 중 유일하게 토기뿐만 아니라 독자적 양식의 무기와 금공예품을 갖추어 그 위세가 남달랐음을 보여줍니다. 장수, 남원, 순천 등 호남 동부 일부 지역의 큰 무덤에서 발견된 대가야계 문물은 그 전성기 판도를 잘 보여줍니다. 00:17:21 신라세력의 확산. ​남해안 바닷길 중개 교역을 밑거름으로 발전한 금관가야는 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신라의 팽창에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낙동강 동쪽에 자리한 비화가야부터 신라문물이 확산되었고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신라는 낙동강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마침내 562년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가야의 다양한 문화는 신라의 지방 문화로 바뀌었고 옛 가야 지역의 유적과 유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00:18:05 창녕지역의 신라문물.창녕지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비사벌’, ‘비화’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여러 가야 지역을 관통한 황강과 남강의 물길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을 넓게 끼고 있어 예로부터 낙동강 문화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역설적이게도 가야로 진출하고자 했던 신라 세력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녕읍과 계성면 일대의 거대한 무덤에서는 당시 신라의 문물이 확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00:18:42 가야에서 신라로.신라의 짧은 굽다리접시와 굽다리 긴목 항아리는 6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그릇입니다. 이 무렵 가야 여러 나라의 무덤에도 이러한 토기를 껴묻기 시작합니다. 무덤의 형태도 돌덧널무덤에서 신라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같은 변화는 김해, 함안, 고성, 합천, 고령 등 옛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 나타나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가야가 신라의 지방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00:19:15 00:19:17 2층으로 올라갑니다.00:19:40 가야와 가야사람들, 화합과 공존으로 일궈 낸 가야인의 역사와 문화?​(화합과 공존이랑 가야랑 어울리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안어울리는거 같은데 ㅎㅎ)00:19:46 00:19:49 다양한 빛깔을 담은 가야의 멋. ​화려한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더하고 그 주인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나타냅니다. 가야 사람들은 수정, 호박, 마노 등의 보석과 유리, 금속 등으로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 가야 왕들의 무덤에서는 일찍부터 부산고구려$ 초록색, 푸른색 등 다채로운 유리구슬 목걸이가 나왔습니다. 4세기 이후에는 금과 은으로도 장신구를 만들었는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과 허리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다양한 귀걸이와 팔찌가 만들어져 가야 사람들의 세련된 멋과 노련한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00:20:33 00:20:37 금동관, 5세기, 부산 복천동00:20:52 가야 귀걸이, 관, 허리띠00:21:23 가야 목걸이, 팔찌, 발찌00:21:28 00:21:30 질박하고 검소한 가야 사람들의 삶. ​가야 사람들은 주로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2층으로 만든 다락집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가야 사람들의 집터에서는 부뚜막과 음식을 찌는 시루, 이동식 부뚜막 토기도 발견됩니다. 가야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얻었지만, 고기잡이와 조개 채집도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김해 봉황동(옛 회현리), 부원동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인 고령에서도 바다 생선 뼈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사람들은 낙동강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풍요와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거나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돌로 어린아이의 머리를 눌러 머리 모양을 납작하게 만들거나 이를 뽑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워지려고 성형을 한 것이었을까요, 어른이 되는 혹독한 통과의례였을까요.00:22:24 가야 도성과 궁성의 모습이 드러나다.가야의 도성과 궁성은 고고학 조사로 그 모습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봉황 토성은 금관가야의 도성과 궁성 구조를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봉황 토성 안팎에는 넓은 건물터와 땅보다 높게 지어진 건물, 토성, 환호(방어용 도랑), 의례 공간, 호안(강기슭이나 둑을 보호하는 장치) 시설 등이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대성동 언덕을 중심으로 무덤이 있는 지역과 봉황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두 지역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대가야의 도성은 고령읍 서쪽 가장자리인 주산에 있으며, 그 아래쪽의 나지막한 언덕에 궁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주산성 아래로 대가야의 왕들이 묻힌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합니다. 이곳에서는 고령읍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가야리 유적은 아라가야의 궁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가야리 유적은 주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토성과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습니다. 유적 주변으로는 의례 공간으로 추정되는 당산 유적과 아라가야의 왕들이 묻힌 말이산고분군이 자리합니다. 00:23:15 땅을 일구고 수확하다.한반도 남부는 북부보다 철기 문화가 늦게 들어와서 쇠로 만든 농기구도 뒤늦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풍부한 철과 뛰어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도끼·괭이·낫 등 중요한 농기구들을 모두 쇠로 만들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는 거의 썩어 없어졌지만 드물게 남아 있는 손잡이가 있어 연결 방법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농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U자형 삽날이나 쇠스랑, 호미, 살포와 같은 농기구도 등장합니다. 쇠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쓰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습니다. 00:23:51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다.가야 사람들은 강이나 바다로 나가 먹거리를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대성동 고분군과 주변의 조개더미에서 나온 크고 작은 낚싯바늘, 작살 등이 대표적인 고기잡이 도구입니다. 00:24:06 조개더미 (패총).2005년 발굴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00개 층으로 구분되며, 4단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아래층인 100층에서는 기원 전후 무렵의 토기가, 맨 위층에서는 4세기 무렵의 단단한 토기(도질 토기)가 나왔습니다. 이는 이 조개더미가 4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조개더미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토기, 뼈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970점, 점을 칠 때 쓰는 뼈 도구 101점, 동물 뼈 5,065점, 조개껍데기 40종, 옥구슬과 철로 만든 물건들, 석기, 송풍관 등이 나와 당시 생활 모습이나 교류했던 지역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00:24:50 00:24:53 가야 토기. 가야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일본의 고대 토기인 스에키가 부산고구려$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00:25:00 인고의 시간으로 만들어 낸 가야토기(항아리, 함안 말이산)가야 토기는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웠습니다. 굴가마는 언덕 비탈면에 굴을 파서 만든 지하식과 비탈을 약간 파고 들어가 지상에 천장을 만든 반지하식이 있습니다. 가마는 아궁이, 땔감을 넣는 연소부, 구울 그릇을 두는 소성부, 불기운과 연기를 내보내는 연도로 이루어집니다.가마는 점토와 연료, 물을 구하기 쉽고 구운 토기를 실어 나르기 쉬운 곳에 만들었습니다. 가야의 가마 유적은 창녕 여초리, 함안 우거리 등이 대표적이며, 고령에도 대가야 사람들이 토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습니다.00:25:42 형태도 무늬도 가지각색.굽다리접시는 가야 토기 중 가장 많이 발견됩니다. 굽구멍 모양이나 무늬에 따라 가야 어느 지역에서 쓰였던 토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00:25:57 따로 또 같이.한 나라로 합쳐지지 않았던 가야는 각기 자율과 공존이라는 특유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토기입니다. 가야 사람들은 지역별로 개성이 뚜렷한 토기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썼습니다.00:26:14 무덤에 껴묻은 토기들00:26:19 쇠를 부려 희망과 미래를 담다.고대 사회는 철을 만들고 철 제품을 보급하면서 변화하고 발전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수많은 철제품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고성 조개더미, 김해 하계리·여래리나 창원 봉림동 유적에서 확인한 철 생산 시설과 고분에서 나온 집게·모룻돌·망치 등 쇠를 다루는 도구는 가야가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내는 기술과 쇠로 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말해 줍니다. 가야가 쇠를 만드는 방법은 앞선 기술이었던 만큼 전문 장인이 은밀하게 전수했습니다. 광석을 캐고 불순물을 없애 순수한 쇠를 만드는 과정에는 복잡한 전문 지식과 능숙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김해 퇴래리 소업 유적에서는 철기를 만들었던 장인들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에는 장인이 사용한 집게와 망치 같은 연장이 같이 묻혀 있었습니다. 이 중 1호 무덤에서는 큰 고리자루칼과 쇠로 기구를 만들던 연장이 모두 발견되어 무덤 주인이 비교적 신분이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 장인의 신분이 높았던 것은 가야에서 쇠를 다루는 기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 줍니다. 00:27:18 활시위를 당기다.화살은 신호를 보낼 때, 사람을 죽일 때, 불을 붙여 쏠 때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화살촉을 박아 만들었습니다. 무덤에서 화살통에 담긴 화살촉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화살통은 겉에 무늬를 넣고 옻칠을 하거나, 가장자리와 통을 메는 끈의 부속품을 금·은·금동으로 만들어 꾸미기도 했습니다. 형태를 복원해 보면 가야 사람들이 화살통을 어떻게 멨는지 알 수 있습니다.00:27:47 무기, 나라를 지키고 권위를 드러내다.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가야의 칼과 검, 창과 화살은 점차 강력해졌습니다. 무기는 전쟁에서도 쓰였지만 용, 봉황 장식으로 꾸민 큰 칼이나 긴 창 등은 다른 나라와 교류할 때나 신분을 드러낼 때도 쓰였습니다.00:28:09 배모양 토기, 창원 현동, 길이 14.6cm 00:28:26 배모양 토기, 김해 여래리, 길이 22.7cm00:28:32 동아시아의 바다를 누빈 가야 배.김해 봉황동 119-9번지 유적에서 노와 배의 일부로 보이는 조각이 나왔습니다. 나무로 된 이 조각은 금관가야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활발히 교류했음을 처음 확인한 사례입니다. 한편 배 모양 토기와 함께 가야의 배 구조를 알아내고 배 만드는 기술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이 조각의 길이는 약 390cm이며, 곡선과 직선 무늬, 쐐기 등으로 보아 뱃머리나 배 끝의 옆판 상단부로 보입니다. 배의 전체 길이는 8~15m가 넘었을 것입니다. 이 조각을 약 18개월 동안 보존 처리를 한 결과 몸체는 녹나무(혹은 생달나무), 쐐기는 삼나무, 노는 상수리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00:29:20 자율과 공존의 물길.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중국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왜(일본), 부산고구려$ 신라, 백제, 고구려 등과 교류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김해 대성동·양동리 유적에서 나온 중국·왜의 물건과 로만 글라스는 금관가야가 국제적으로 교류했음을 보여 줍니다. 대가야 지역인 고령 지산동 유적에서는 챙 달린 투구 같은 일본계 금속 제품과 오키나와산 야광 조개로 만든 국자 등 5세기 무렵의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합천 옥전 무덤에서는 서역과 관련된 유리잔이 나왔습니다. 일본에서도 토기, 덩이쇠 등 철로 만든 가야계 유물이 다양하게 나와 가야 토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스에키가 유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 규슈부터 긴키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대가야계 금동관이나 금귀걸이, 금은제 말갖춤 등 5세기 무렵 이후 유물이 00:30:14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여러 가야가 주변 나라들과 외교적 관계를 활발히 맺었음을 말해 줍니다.00:30:27 배모양 토기, 창원 현동, 길이 14.6cm 00:30:44 말도 용맹한 전사.가야의 김해 대성동·양동리 유적에서는 4세기 무렵 쓰인 재갈과 발걸이, 5세기 무렵 쓰인 장식용 말갖춤을 볼 수 있습니다. 가야 유적에서 보이는 말의 갑옷과 투구는 당시 철기를 만드는 가야의 기술이 최고였음은 물론 가야가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치열하게 벌였음을 알려 줍니다.00:31:07 00:31:17 가야 전사의 상징, 갑옷과 투구가야의 갑옷은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다가 쇠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철 갑옷도 만들었습니다. 갑옷은 철판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나뉘는데, 철판을 연결할 때는 못이나 가죽끈을 이용했습니다. 갑옷에는 장식도 했는데, 새나 고사리무늬로 장식된 갑옷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확인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갑옷의 무게는 4~5kg 정도이지만, 쇠가 녹슬기 전에는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 만들었으며, 윗부분은 깃털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투구의 종류는 세로로 긴 철판을 엮어 만든 것에 반원 모양의 판을 얹은 투구, 앞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투구, 모자 앞에 챙을 단 투구, 관모 모양의 판을 붙인 투구 등이 있습니다. 00:32:07 다른 나라의 낯선 향기가 머물다.남해안 일대 뱃길을 따라 왜(일본)와 관련된 유물이 나오고, 일본에서는 가락국(대가야)의 귀걸이가 여러 곳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왜와 가야 사람들이 꾸준히 오가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특히 고대 일본의 토기인 하지키와 스에키는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많이 확인됩니다. 스에키는 단단한 회청색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00:32:35 00:32:43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다.상형 토기는 인물이나 동물 또는 물건의 모습을 본떠 만든 토기입니다. 오리·사슴·말과 같은 동물이나 집·배·수레·뿔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을 생략·과장·추상화하여 만들었습니다. 몸통 속은 비어 있고 액체를 넣거나 따르도록 구멍이 나 있습니다. 무덤이나 의례 장소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상에서 썼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 등 사후 세계에 대한 바람을 담은 의례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00:33:16 00:33:21 글과 기호를 사용하다.종이를 발명하기 전 사람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다듬어 종이처럼 썼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과 글자를 지울 때 쓰는 손칼이 나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문자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변한이 중국과 교역할 때 문자가 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가야 유물에는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습니다. 예로는 김해 양동리 유적의 청동 세발솥에 새겨진 ‘서구궁西口宮’, 합천 저포리 유적의 항아리에 새겨진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긴목항아리에 새겨진 ‘대왕大王’, 산청 하촌리 유적의 토기에 새겨진 ‘이득지二得知’ 등이 있습니다. 이런 글자들은 가야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00:34:09 눈으로 한 번, 귀로 또 한 번.잔 아랫부분에 흙구슬(흙으로 만든 방울알)이 들어 부산고구려$ 있어서 방울잔이라고 합니다. 먼저 구운 흙구슬을 넣어 잔을 만든 후 구웠습니다. 흔들 때마다 들리는 청아한 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요? 방울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아 마시는 용도보다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맛을 즐기는 용도로 보입니다. 또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쓰는 방울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소리로 귀신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리와 맛을 함께 즐긴 가야인의 멋이 느껴지지 않나요?00:34:44 가야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가야 사람들이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땅이 기름져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라는 기록도 당시 가야에서 농사를 많이 지었음을 보여 줍니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에서 가야 사람들이 오곡(쌀·보리·조·콩·기장)과 과일, 채소 등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이 밖에 소·돼지를 비롯한 가축, 사냥한 멧돼지·사슴, 산이나 들에서 모은 밤·도토리, 강이나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조개 등도 먹었습니다. 가야의 집터에는 음식을 만드는 부뚜막이 있었으며, 부엌 신(조왕신)을 모셨다는 문헌 기록으로 보아 부엌이 집 안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00:35:32 영혼의 전달자.'삼국지'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새를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이자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성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무덤에 넣었습니다. 새 모양 토기는 속이 비어 있고 등과 꼬리 부분에는 구멍이 있어 액체를 넣거나 따를 수 있습니다. 새 모양 토기를 목 부분을 자르고 넣거나 머리 부분만 넣기도 한 것을 보면 새와 관련한 의례가 다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00:36:10 의례는 집 안이나 집 주변, 농경지, 무덤, 산, 강, 바닷가 등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에서 치러졌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흙 인형,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토기와 철제품, 점을 칠 때 쓰는 뼈 등을 의례에 사용했습니다.00:36:27 00:36:34 집모양토기, 5세기, 창원 석동, 다락집의 형태00:37:00 나가는 길에 영상실이 있습니다.00:37:04 해상왕국, 소년의 꿈 이라는 영상인데요. 2배속으로 보시겠습니다.00:38:55 영상보고 나왔습니다.00:39:01 책을 보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00:39:08 시각장애인을 위한 체험 모형도 있네요.00:39:15 문화재 관련 책들입니다. 시간 많을때 있기 좋겠네요.00:39:29 만남의 광장같은 카페도 있어요.00:39:35 밖으로 나왔습니다.00:39:41 긴 복도에 사진들이 있네요.00:39:53 긴 복도를 지나 특별전을 보러 갑니다.00:40:27 세계유산 백제, 세계유산 가야 라는 전시를 보러 왔습니다.00:40:31 00:40:47 현수막이 아주 거창하네요. 기대가 됩니다.00:40:56 세계유산 백제, 세계유산 가야 특별전 입장했습니다.00:41:08 백제의 자연이라는 미디어아트인데, 뭔지 모르겠습니다.00:41:46 백제 명품 속에서 살아난 백제의 문양. 이것도 미디어아트인데, 누워서 천장을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양을 보여주는건 알겠는데, 말하고 싶은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00:43:49 문양이 있는 백제기와 좀 전시되어 있구요.00:44:04 백제역사유적지구 사진(영상도 사진이었음)이 전시되어 있네요.00:44:36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다시 들어가 봤으나 끝이었네요.00:44:54 전시가 되게 황당하게 끝난다00:44:57 여기가 거의 끝입니다00:44:58 아 진짜요?00:45:03 기대하세요00:45:20 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00:45:28 황당해하면서 관람을 마쳤습니다.00:45:41 00:45:58 영상컨텐츠(미디어아트)라는게 잘 만들어 놓으면 재활용도 가능하고 여러군데에서도 쓸 수 있어서 괜찮은데.00:46:07 대표적인 사례로 예전에 고궁박물관에서 '고궁연화'라는 전시회를 했었거든요? 경복궁의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영상을 되게 잘 만들었어요. 그런건 두고두고 써먹을 수가 있거든요?00:46:28 근데 저런 건 좀. 저걸 왜? 무슨 의미인지?00:46:37 제일 모던한 형태로 만들어야 여기서도 쓰고 저기서도 쓰고 그러는 건데....00:46:54 영상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